다시, 스몰 스텝 - 문수정의 이야기 (1)
그날도 나는 여느때처럼 두 명의 직원들에게 컨텐츠 수정사항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왠일일까? 그날따라 직원들이 내 말을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스믈스믈 올라오기 올라오는게 아닌가. 결국 주체할 수 없는 화를 참지 못한 나는 저도 모르게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당황한 직원들의 눈빛이 한참동안이나 기억 속에서 어른거렸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 분노의 정확한 이유를 나도 잘 모르겠다는 거였다. 그럴 때면 언제나 머쓱함과 낭패감이 밀려들곤 했었다. 그리고 이런 나 자신이 낯설기만 했다.
어디 그뿐인가. 외부 미팅을 잘 마치고 클라이언트의 사무실을 막 나설 때였다. 상대측 대표가 ‘오늘 미팅 참 편안했다’며 웃는 얼굴로 배웅인사를 했다. 아마도 그냥 예의상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 마치 비수처럼 내 뇌리에 꽂혔다. 서로 긴장해야 할 미팅이 편안했다니... 나는 그 말이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되어 참을 수가 없었다. 다시는 상대방을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씩씩대며 건물을 나섰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내 기분과 감정 상태를 충분히 설명할 자신이 없다.
그 무렵의 나는 말도 걸음도 빨랐다. 오죽하면 주변 사람들이 ‘좀 쉬어라, 숨 막힌다’고 얘기할 정도였을까.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스스로 요즘 좀 일이 많은가 보다, 예민해졌나보다 하며 넘길 뿐이었다. 일을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지킬 수 없는 약속임을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찾아온 번아웃을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었다.
일부러 조금씩 늦게 출근하고 이른 퇴근을 했다. 전혀 집중할 수 없었지만 명상도 하고 억지로 산책도 했다. 마치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증상들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급기야 정상적인 생활에 지장을 느끼게 되면서 스스로도 ‘진짜 내가 이상하구나’라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이런 나의 변화를 알아차린 지인이 진지하게 병원에 가보라고 일러준 때도 그 즈음이었다. 결국 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심각한 우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진료실에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눈물을 흘리고는 약을 처방받아 나왔다.
그때의 내 증상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분노의 정도가 심각했다. 상대방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의 미움이 찾아온 후에는 어김없이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머리가 멍해져서 뭔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두시간이면 할 일을 미루고 미루다 결국 일주일을 넘기곤 했다. 3년 넘게 주 2회를 다녔던 운동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름이나 카드 비밀번호 등을 갑자기 잊어버렸다.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빈 앱에 들어가 메뉴를 주문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단기기억 오류와 같은 인지적 장애가 계속되면서 MRI 검사를 받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같은 인지 능력의 저하는 우울등의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였다. 나를 진료한 의사는 뇌졸중이나 외부의 심한 충격이 아닌 이상 치매나 뇌기능의 문제가 생길 수 없다고 했다.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잘 자던 내가 잠을 못이루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새벽 3,4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점점 늘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나를 향한 시선을 왜곡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무시한다, 비웃는다, 욕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친한 사람들과 말도 안되는 다툼을 하게 되었다. 타인에 대한 원망이 많아지고 자꾸만 미래를 비관적으로 상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런 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원래 집중만 하면 뭐든지 해낼 수 있다고 믿는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지금껏 몰입과 자신감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자신감, 자존감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그 어떤 결정도 쉽게 내릴 수 없는 상황이 왔다. 나만 부족한 듯 했고 일상의 삶이 덧없게 느껴졌다. 점심 메뉴를 정하는 것도, 심지어 아침에 입고 나갈 옷 하나 고르는 것도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업무 미팅을 하던 중이었다. 직원 하나가 갑자기 내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게 아닌가. ‘대표님은 인생의 목표가 뭐에요? 가장 큰 욕구는요? 왜 그렇게 성취가 중요하세요?’ 마치 취조처럼 이어진 이 질문이 나는 그렇게 기분 나쁠 수 없었다. 그러나 대놓고 이런 불편한 감정을 표현할 수도 없었다. 당황하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나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채 그 상황을 면피하기 위해 허둥댈 뿐이었다.
그 무렵의 나는 일주일 내내 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4일만 일하는게 나의 비전이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유튜브는 항상 2배속으로 보았다. 심지어 명상앱을 두배속으로 들으면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덜 일해도 회사가 잘 돌아갔다면 일을 줄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 무렵의 내게는 그런 확신이 없었다. 직원들 대부분은 1년 미만의 신입들이었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일하다보니 일하는 시간은 한정없이 늘었다. 결국 업무 시스템을 만들겠다면서 내가 더 많이 일하는 구조를 만들고 있었다. 말로는 직원들을 믿는다고 했지만 그건 엄연한 거짓말이었다.
나는 이런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나의 강점으로 일하고 있는데, 살고 있는데 왜 행복하지 않은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의 성격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힘들어했다. 직원들은 얼마 견디지 못하고 자꾸만 회사를 나갔다. 그렇다고 그들이 원하는대로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공정하고 공평한 업무 처리를 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직원들과의 끊임없은 충돌을 만들어낼 뿐이었다.
어느 순간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기준조차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직원들에게 휘둘리기 시작하니 더더욱 되는 일이 없었다. 그제서야 어렴풋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나는 무작정 일만 하는 사람이었구나, 나만의 가치관으로 전혀 살지 못하고 있구나, 그 밤은 더더욱 오랫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