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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 밖으로 나온 철학, 선을 넘는 기술, 헬리녹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브랜드가 있다. 남들이 닦아놓은 길을 세련되게 따라가는 브랜드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깃발을 꽂아 새로운 표준을 만드는 브랜드다. 아웃도어 업계에서 '헬리녹스(Helinox)'는 명백히 후자다. 이들은 한국의 작은 강소기업에서 시작해 현재는 슈프림(Supreme), 프라그먼트(Fragment), 루이뷔통(Louis Vuitton)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글로벌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성공을 단순히 '운이 좋았던 협업'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헬리녹스의 여정은 스몰 브랜드가 어떻게 압도적인 기술력을 '문화적 자산'으로 치환하여 전 세계적인 팬덤을 구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서사다.


기술이라는 뼈대: 세계 1위의 '폴(Pole)'이 만든 근거 있는 자신감


헬리녹스의 모태는 세계 텐트 폴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는 '동아알루미늄(DAC)'이다. 대다수 스몰 브랜드가 화려한 디자인이나 마케팅 언어로 자신들을 포장할 때, 헬리녹스는 비즈니스의 가장 밑바닥인 '소재'와 '기술'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 튼튼한 알루미늄 합금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기술력을 응축해 만든 첫 작품이 바로 '체어원(Chair One)'이다.


스몰 브랜드에게 기술력은 타협할 수 없는 생존의 근거다. 헬리녹스는 "캠핑 의자는 무겁고 부피가 크다"는 고정관념을 기술로 깨부쉈다. 1kg도 채 되지 않는 무게로 145kg의 하중을 견디는 이 작은 의자는 전 세계 백패커와 캠퍼들의 가방 속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본질적인 기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을 때, 브랜드는 구차한 설명 없이도 시장의 주인공이 된다. 헬리녹스의 성장은 "우리가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것으로 무엇을 더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기술적 응답이었다.


카테고리의 창출: 캠핑 장비를 '라이프스타일 오브제'로


헬리녹스가 위대한 이유는 단순히 의자를 잘 만들어서가 아니다. 이들은 캠핑 의자를 산속에서만 쓰는 도구가 아니라, 도심의 거실이나 카페, 혹은 갤러리에도 어울리는 '디자인 오브제'로 재정의했다. 거칠고 투박한 아웃도어의 문법을 버리고,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시각 언어를 도입했다.


이러한 전략은 '아웃도어의 일상화'를 이끌어냈다. 헬리녹스의 제품은 집 안에서는 세련된 가구가 되고, 밖으로 나가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장비가 된다. 이들은 "캠핑을 가기 위해 사는 물건"이 아니라 "가지고 싶어서 샀는데 알고 보니 캠핑용인 물건"을 만들었다. 스몰 브랜드가 스케일업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속한 카테고리의 경계를 스스로 허물어야 한다. 헬리녹스는 '장비'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넓은 바다로 나아감으로써 대체 불가능한 브랜드가 되었다.


협업의 미학: 브랜드의 급(Level)을 결정하는 파트너십


헬리녹스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전 세계적인 '협업'이다. 슈프림과의 협업은 헬리녹스를 단순한 아웃도어 브랜드를 넘어 스트릿 패션과 서브컬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이후 BTS, 네이버후드, 디즈니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파트너십을 통해 브랜드의 세계관을 확장했다.


주목할 점은 헬리녹스가 협업의 '을'이 아닌 '갑'의 위치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왔다는 점이다. 대기업이나 유명 브랜드가 헬리녹스에 손을 내미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독보적인 기술력과 상징성 때문이다. 협업은 스몰 브랜드가 가진 한정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확장하는 지름길이다. 헬리녹스는 협업을 통해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는 동시에, "어떤 브랜드와 함께하느냐가 그 브랜드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영리하게 이용했다. 덕분에 헬리녹스는 이제 로고 하나만으로도 제품의 급을 올려주는 '인증 마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공간의 철학: 'HCC(Helinox Creative Center)'가 보여주는 태도


서울 한남동과 부산, 그리고 일본 도쿄에 위치한 '헬리녹스 크리에이티브 센터(HCC)'는 이들의 브랜딩이 완성되는 정점이다. 이곳은 제품을 진열하고 판매하는 상점을 넘어, 헬리녹스가 추구하는 문화와 예술적 영감을 공유하는 플랫폼이다. 층별로 구성된 테마는 아웃도어의 거친 야생성과 도심의 세련된 감각을 절묘하게 교차시킨다.


오프라인 공간은 스몰 브랜드의 실체를 확인시켜주는 결정적인 장치다. 헬리녹스는 HCC를 통해 고객들에게 "우리는 단순히 의자를 파는 회사가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크리에이티브 그룹"임을 선언한다. 공간을 채우는 조명, 음악, 가구의 배치 하나에도 브랜드의 고집이 서려 있다. 고객들은 이곳에서 제품을 만져보고 앉아보며 헬리녹스가 설계한 '단단하고 자유로운 삶'의 감각을 오감으로 체험한다. 온라인이 주지 못하는 이 묵직한 실체감이 헬리녹스의 팬덤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결론: 가장 작고 가벼운 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법


헬리녹스의 성공은 우리에게 브랜딩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자본의 규모가 브랜드의 위대함을 결정하는가? 헬리녹스는 아니라고 답한다. 1g의 무게를 줄이기 위한 집요한 연구, 카테고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연한 사고, 그리고 자신들의 가치를 알아봐 줄 파트너를 고르는 안목. 이 모든 것이 결합했을 때 작은 브랜드는 거대한 흐름이 된다.


'헬리녹스(Helinox)'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의 태양신 '헬리오스(Helios)'와 밤의 여신 '녹스(Nox)'의 합성어다. 낮과 밤, 야생과 도심을 아우르겠다는 이들의 포부는 이제 현실이 되었다. 가장 작고 가벼운 의자로 세상을 움직인 헬리녹스. 이들의 행보는 자신만의 '뼈대(Pole)'를 가진 스몰 브랜드라면 전 세계 어디서든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다.


진정한 혁신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손끝에서 느껴지는 가벼움과 앉았을 때 느껴지는 단단한 신뢰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헬리녹스는 오늘도 묵묵히 증명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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