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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카 Aug 17. 2018

처음부터 잘하고 싶어서

잘하기 위해선 못하는 과정도 필요한 것을

사진도 찍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려야지.
많이 보고 듣고 느끼고 창작하는 한 해가 되기를!


2016년 새해를 맞으며 호기롭게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포부다. 지금은 2018년이다. 사진도 찍고 글도 썼지만 그림은 아직까지 한 장도 그리지 못하고 있으므로 2년 넘게 다짐을 못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갑작스러운 욕구라기보다 잊고 있었던 원래의 취미 발현에 더 가깝다. 

오래된 취미인 사진을 계속 찍다 보니 마음 한편에 아쉬움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원하는 구도나 빛, 풍경들이 머릿속에 있음에도 어쨌든 실제로 눈 앞에 그것이 나타나야 비로소 담을 수 있었으므로. 그림으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한계 없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 잘 그리고 싶었다. 간단한 필기도구로도 그림 한 장을 뚝딱 그려내는 모습이 '멋있어 보인다'는 다소 허세가 가득한 이유도 물론 그중에 하나였다.


약간의 강제성이 동반되어야 비로소 실천에 옮기는 나 자신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신청했던 수채화 클래스. 그러나 클래스 과정이 끝난 후 혼자 흰 종이 앞에 마주하면 머릿속도 하얗게 비워지기만 했고 무엇을 그려야 할지, 어떻게 이 종이를 채워야 할지 쓸데없는 고민들만 가득 찼다. 온전히 내 의지로 진득하게 앉아 선 하나 그릴 수 없었다.

내 그림을 그리는 대신 남의 그림을 구경하는 시간은 속절없이 늘었다. 소셜미디어 피드에는 화려한 솜씨를 펼치는 금손들의 퍼포먼스들이 차고 넘쳤고 그들의 놀라운 결과물을 보며 질투심에 가득 차 잘 하고 싶다는 욕심만 그득그득 해졌다.


문득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그림 도구가 생각났다. 자석이 달린 펜이 지나간 자리에 철가루가 모여 마치 검은색 펜으로 선을 그은 것처럼 그림이 그려지는 미니 칠판 같은 장난감. 한 면이 가득 차도록 빽빽하게 그리고는 미련 없이 쓱, 손잡이를 잡고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금세 파도가 휩쓸고 간 모래사장처럼 흔적 없이 깨끗해진다. 나는 이 장난감을 하루 종일 지친 기색 없이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한동안 커다란 액자로 걸려있던 나의 그림. 길고 둥그런 테이블 위에 맛있는 음식들이 그려져 있고 대가족이 한데 모여 앉아 즐겁게 식사하고 있다. 독특한 점이라면 공중에서 테이블을 찍은 것 같은 구도와 사람들이 모두 공중을 보며 누워있다는 것? 유아의 그림에서나 볼 법한 유치 한 데다 입체감은 무시한 그림이지만, 지금은 엄두도 못 낼 그 큰 8절지를 겁도 없이 알뜰하게 채운 건 바로 나였다. 


이전의 과감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른 이들보다 서툴고 못난 결과를 낼까 봐 두려워졌다. 미루면 미룰수록 두려움은 불어나 시작과 한 걸음 더 멀어졌다. 연필의 한 획에, 물감의 붓질 하나에 그림을 망쳐버릴까 무서워졌다. 비단 그림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니었다. 일에도 인간관계에서도 잘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실수할 때마다 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일순간 비치는 실망을 빠르게 캐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만회하기 위해 급하게 완벽하려고 할수록 오히려 실수의 수렁으로 빠지기 일쑤였다. 내 고질적인 고민을 털어놓으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물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겠죠, 그렇지만 못하는 과정을 견디기 힘든 걸요.' 


하지만 미루고 미뤄도 죽을 때까지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침착하게 실수를 줄이는 방법을 배워나가도 모자랄 판에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는 없는 법. 내 방에 쌓여있는 멀쩡한 스케치북과 그림도구들을 더 이상 썩힐 수도 없다. 고민은 실컷 했으니 정말 이제는 미룰 수 없이 시작해야 되는 때가 온 것 같다. 못하고 못하다 보면 덜 못하는 날이 오고 언젠가는 정말 잘하게 되겠지.

만화스러운 유치한 그림체의 엉성한 그림 실력이지만, 내년 새해 역시 한 장도 못 그린 채 맞이하지 않도록 부담 없이 망친 그림으로 일단 그 처음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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