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단 하나만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Plaza de Espana '스페인 광장'의 디테일하며 웅장한 모습을 바라보며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광장 중앙 홀에는 강렬한 눈빛의 플라멩코 댄서가 박수와 기타 소리에 맞춰 무아지경에 빠져 춤을 춘다. 여인의 강렬한 눈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각성이 된다. 어디서도 보기 힘든 이런 공연을 팁 몇 유로에 즐길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가. '세비야'야 말로 누구나 상상하던 스페인의 모습이 아닐까?
숙소가 있는 조용한 주택가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세비야와 사랑에 빠졌다. 온화한 날씨와 거리마다 널려있는 오렌지 나무, 아름다운 건물들... 그저 걷기만 해도 웃음이 나올 만큼 행복해진다. 도착한 첫날은 하루종일 스페인 광장에 머물렀다. 너무도 아름다운 곳이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직 스페인 광장만을 봤을 뿐인데도, 오늘 하루가 꽉 찬 느낌이다. 더 좋은 건 숙소 근처에 세비야에서 유명한 한식당이 있다.
“매콤한 한국음식 너무 먹고 싶었는데, 생각만 해도 행복해!!"
그날 밤, 내일 어떤 메뉴를 주문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며 잠들었다. 다음날 첫 번째 손님으로 입장해서 잡채와 불맛 가득한 제육볶음, 육개장, 돌솥비빔밥까지 넉넉하게 주문했다. 그동안 매운맛이 그리웠다며, 정말 맛있다며, 행복하다며 그렇게 웃음 지었다. 오랜만에 먹는 한식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세비야 맛집이었다.
앞으로 닥칠 일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식당에서 나왔다.
“오빠, 어떻게 나 배탈 났나 봐. 도저히 못 참겠는데 어떻게 하지?
화장실 아무 데나 들어가야 할 것 같아. 정말 어떻게 하지?”
한식당으로 다시 돌아가기엔 애매한 거리, 집까지 가다가 사달 날 것 같고, 주변엔 들어갈만한 곳도 없다.
엄청난 위기에 당면했다. 실로 엄청난 위기다. 오랜만에 매운 음식을 몰아 먹었더니, 위장이 놀란 모양이다. 베트남 여행 이후 오랜만에 겪어보는 장염이다.
(남편의 일기)
걷다가 사자나 호랑이를 만나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세상에 '나와 설사'만 존재하는 느낌이다. 이 상황에서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된다. 집까지 가는 길엔 횡단보도를 여러 번 건너야 해서 정우를 보살펴야 하기에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 일단 어디든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그런 경험이 여러 번 있기에 잘 안다. 정말 엿 같은 기분과 울고 싶고, 최악의 상황만큼은 기필코 막겠다는 절박한 심정이 어느 때보다 강해진다. 나도 출근길 운전 중에 신호가 와서, 주차장을 찾겠다며 돌아버릴 것 같은 경험을 한 적 있다. 정말 급박하고 정말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 상황에도 정우는 신났다.
“엄마 왜 그래, 엄마 왜 그래?”
나는 답을 안 할 수가 없다.
“응, 엄마가 배탈 났대. 엄청 급하대.”
“엄마 괜찮아?”
“응 괜찮아. 그런데 뭘 잘못 먹은 거지?”
“이정! 조금만 참아! 집에 거의 다 왔어!! 집으로 가는 게 좋겠어."
내가 먼저 선두에 서서 집으로 뛰었다. 문을 1초라도 빨리 열어야 한다. 문 앞에 서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그녀는 걷다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리에서의 아찔한 사고를 막았다. 인간의 의지는 대단하다. 왜 인간은 이런 의지와 끈기를 일상생활에서 발휘하지 못하는 걸까? 이걸로 끝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엄마! 나 응가 마려워.”
기저귀를 뗀 이후부터 지금까지 엄마 아빠에게 자신의 흔적이 얼마나 대단한 지 확인해 보라고 한다.
응가만 잘 싸도 칭찬받을 수 있는 어린이들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가...
그런데, 정우의 변이 묽다.
“정우야, 배 안 아파?”
“배가 조금 아파.”
그 뒤로 정우는 하루에 10번 이상 설사를 했다. 먹기만 하면 배가 아프다고 한다. 불행히도 나의 장염 또한 심해졌다. 아들과 둘이서 밤새도록 화장실에 들락날락하느라 잠을 설쳤다. 화장실 두 개 있는 숙소를 얻은 게 신의 한 수 일 줄이야... 만약 하나였다면 일어났을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이쯤 되면 다시 몰입의 시간으로 접어든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다. 얼른 건강을 되찾아야 한다.
어린 정우는 장에 염증이 생겼으니, 고열이 시작되고 어느새 40도를 넘나 든다. 약국에 뛰어가 약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지사제와 유산균을 구입했다. 나는 엄마이기에, 아픈 몸을 이끌고 쌀을 사다가 흰 죽을 쑤어 먹이며, 정우의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바라본다. 3일이 지나도 별다른 진전 없이 열과 설사가 계속되어 결국엔 urgent care로 간다. 결국 유럽에서도 병원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와이와 밴쿠버 병원에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고열이 나는 아이를 본 의사가 보호자인 우리에게 했던
"어떻게 해 드릴까요?"라는 황당한 질문이었다. 스페인 소아과 의사는 그런 질문을 제발 하지 않기를...
엄마까지 장염으로 고생 중이니, 부디 항생제 처방해 주길 바라며 평판이 좋다는 소아과에 갔다.
(북미를 비롯한 유럽에서 만 12세 미만 어린이에게 항생제 처방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다행히 청진기로 장소리를 확인결과 정우 상태가 정상이란다. 하지만, 장기간 설사가 계속되기에 항생제를 처방받았다. 처방받은 항생제와 유산균, 정장음료를 먹이니, 이내 아이의 상태가 호전되었다. 구매한 유산균 덕분에 내 상태도 나아졌다.
우리의 세비야 일정은 강력한 장염을 경험하며 끝이 났다.
아이와 내가 동시에 아프니, 계획했던 세비야 일정 중 4일을 숙소에서 흰 죽을 먹으며 지냈다. 마지막 날에서야 컨디션을 되찾고 아름다운 스페인 광장 Plaza de Espana에 다시 방문했다. 몇 번을 방문해도 질리지 않고 언제나 아름다웠다. 세상에 수많은 Plaza de Mayor가 있는데, 가장 아름다운 광장(Plaza)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