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전우
나와 동생은 연년생이다. 내 인생의 기억 최초의 순간부터 동생이 있었다. 엄마 말로는 유년 시절 유난히 사이가 좋은 남매로 동네에 소문이 났다고 한다. 어딜 가나 동생과 손을 꼭 잡고 다니고 누나가 동생을 살뜰히 챙기는 모습, 순한 동생이 누나를 따르는 모습을 보고 아이 하나만 키우시던 동네 아주머니께서 우리 엄마한테 우리를 보면 아이 하나 더 낳고 싶어진다고 자주 말씀하셨다고 한다. 어릴 때 부터 나는 동생을 너무너무 사랑했다. 또래보다 키가 작아 늘 맨 앞줄에 섰던 동생은 '앞으로 나란히'를 해본 적이 없었고 동글동글 귀염상에 웃으면 눈이 없어지던 순둥이였던 동생은 한 살 차이여서 나도 그 때 어린아이였을텐데 그 존재 자체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나는 기억이 없지만 동네에서 놀다가 동생이 누구한테 얻어맞으면 내가 찾아가 때려주어서 우리 엄마가 그 아이 엄마한테 찾아가서 사과하고 약 값을 물어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자라면서 부모님이 집을 비우시는 일이 잦았기에 같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놀기도 했지만 둘이서만도 잘 놀았다. 동생은 어릴 때 누나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세상이 없어지는 아이마냥 내 손을 잡고 다니려고 했다. 내 유치원 졸업식 사진은 그렇다치고 내 초등학교 1학년 소풍에도 학급 단체 사진 구석에 내 동생이 함께 찍혀있는걸 보고는 정말 누나가 가는 곳 어디든지 따라다녔구나 싶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이던 80년대에는 체벌이 일상적이었기 때문에 엄마한테(아빠한테는 맞은 적이 없네 그러고보니) 정말 많이 맞고 자랐다.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도 있었지만 커서는 엄마가 본인의 감정을 추스리지 못해 기분에 따라 때린 적도 많았다고 하신다. 그 모든 체벌의 순간에도 우리는 함께 했다. 내가 맞고 있으면 방구석에서 동생이 손바닥을 싹싹 빌고 있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런 기억 때문일까, 우리는 전우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많이 했었다.
그야말로 내 동생은 내 전우다. 인생의 바다 한 가운데 같은 배를 탄, 큰 파도와 태풍이 몰아칠 때 같이 부둥켜안고 버티고, 바다가 잠잠해지면 날씨 좋은 날 같이 햇볕 구경도 하고 같이 낚시해서 맛있는 것도 해먹으며 희노애락을 공유한 인생의 전우. 어린 시절 집안에 이런저런 일들이 끊이지 않아 평범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시간들. 인생은 너무나 불공평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게 되었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게 꿈이었다. 힘든 가정형편을 꾸려야 했기에 아빠는 엄마에게 한 번도 제대로 월급봉투를 가져다 주신 적이 없었기에 나는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마론인형을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고, 동생도 가지고 싶었던 장난감을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기쁜 순간도 같이, 힘든 순간도 같이 하며 자랐지만 동생은 많은 것들을 누나한테 양보하며 자랐을 것이다. 너무나 사소한 것들에서부터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대학교 등록금을 마련하기 힘드니 어차피 갈 군대 일찍 입대한 것까지 포함해서.
간호대학을 다녔던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수업을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거 하루 빠진다고 뭐 큰일이 생긴다고 동생이 입대를 하는데 배웅조차 가지 않았나 싶다. 내가 평생동안 나를 원망할 이유는 그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님도 가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 사실은 나중에 동생이 제대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 이야기해주는 바람에 알게 되었다. 동생은 훈련소까지 혼자 갔다. 울적한 마음이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혼자 다독이면서 마지막으로 밥집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고 했다.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혼자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데 가족 단위로 온 손님들이 몰려들자 주인이 빨리 나가라는 식으로 동생에게 눈치를 줬다고 한다. 동생은 밥을 채 다 먹지 못하고 쫒겨나듯이 나와서 울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엄마는 펑펑 우셨다. 우리는 정말 왜 그러고 살았을까. 왜 하나뿐인 아들을 동생을 외롭게 만들었을까.
동생의 외로움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우리 둘이 주로 시간을 보내야했던 그 때부터였을까. 내 마음 깊은 곳에도 자리하고 있는 그 존재의 외로움. 그마저도 함께 나눠가지게 되었던걸까. 동생은 마음 속 깊은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뭘 해도 괜찮다는 아이였다. 사춘기 시절 부모님께 흔한 반항의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아이였다. 그게 착하고 순한 아이여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동생은 누나가 너무 심하게 사춘기를 앓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기까지 얹으면 엄마가 너무 힘들것 같아서 그냥 속으로 삭혔다고 했다.
아무도 모르게 삼켜졌을 동생의 이야기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켜켜이 쌓이고 쌓여서 어디에서부터 무엇부터 꺼내놓아야 할지 스스로도 모르는 무언가가 된 듯 했다. 뭔가 본인의 진심, 속 깊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며 울던 아이. 자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어 그 방법을 모르는 아이가 되어버린 것 같다.
부모가 자식 잘되라고 하는 말과 명령들이 통제가 되어 우리의 앞길을 결정짓는 인생. 그런 거듭된 통제에도 '네 알겠어요'라고 순순히 따르던 동생은 이제부터는 본인이 살고 싶은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했는지 어느 날 밤, 이제 나간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짐을 싸서 연고도 전혀 없는 도시로 떠났다. 그 후 4년 동안 엄마와 나는 동생을 네 번 봤다. 마지막으로 본 동생은 작년 여름이었다.
지난 4년 동안의 동생을 생각하면 사실 보지 못하고 지낸 시간이 훨씬 많아서 떠올릴 기억 자체가 많지 않다. 잘 모르겠다 사실. 지난 4년 이전까지 내가 알던 동생과 이후의 동생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동생이 떠나고 동생이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동생의 휴대폰에 있는 메시지들, 은행 거래 내역들을 뒤져보고,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말들을 모아서 조합해았다. 거기에는 내가 모르던 동생의 모습과 상황들이 너무나 넓고도 깊게 펼쳐져서 내 동생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을 함께 했고, 같이 자라온 누나인데 가족인데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에 나 자신에게 부끄럽고 화가났고, 엉망진창인 상황들, 늪처럼 발목을 뺄 수 없어 허둥대고 있었으면서 한번도 제대로 이야기해주지 않고 잘 지내는 모습들로만 포장해서 보여준 동생에게 화가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집을 나갔기에 잘 사는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었을텐데 정말 어떻게 사는지 힘들지는 않은지 깊이 헤아려보지 못한 나에게 다시 화가났다.
내가 기억하는 동생의 모습은 나만이 기억할 수 있는데 세월이 흐르면 나에게서조차 잊혀질까봐 동생과 함께 했던 일들, 동생에 대해 생각나는 기억들을 기록하고 있다. 나까지 잊어버리면 세상에서 동생의 흔적이 전부 사라질까봐 동생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