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기록
나는 흰머리가 많다. 이젠 직장도 다니지 않으니 염색은 더욱 하지 않게 되어, 정수리는 언제나 흰 눈을 맞은 것만 같다. 그러다 엊그제 중요한 면접과 지인 결혼식을 앞두고 염색을 하게 되었는데, 검어진 머리에 사뭇 한 10살(?)은 젊어 보인다.
흰머리뿐 아니라 요즘 노안도 왔다. 안경을 쓰고도 보이던 깨알 같던 글씨들이 이젠 안경을 벗고 봐야 보인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보이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해야 또렷이 초점이 맞춰진다.
요즘 40대 중반으로 달려가면서, 여러 가지 나이 듦의 경험을 한다.
흰머리나 노안 말고 요즘 자주 직면하는 상황이 있으니, 그건 자꾸만 '뭔가를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는 거다.
8월 초반부터 고관절에 통증이 있었다. 아마 무리하게 헬스장에서 기구운동을 한 때문 같았다. 고관절이 아프니 서있지도 걷지도 무언가를 들지도 못했다. 그래서, 모든 활동을 멈추고 집에서만 지내야 했다.
몸이 아프면 쉬는 게 당연한데, 처음엔 그게 잘 안 됐다.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로서는 하고 싶은 운동을 하지 못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하는 것에 짜증이 났다.
그렇지만 이내 마음을 돌렸다. 몸이 불편해 겪을 수 있는 '노년의 경험'을 미리 앞당겨 체험한다 생각하며 지내보기로 했다.
일단 고관절이 아픈 것을 인정하고, 아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했다. 인정하니 내가 할 일은 딱 두 가지로 정해졌다.
'최대한 움직이지 않기, 나아지면 움직이기.'
앉을 수 없을 때 누워있고, 누워 핸드폰 보는 게 지겨워질 땐 잠을 잤다. 낮잠은 참 달콤했는데 이게 웬 호사인가 싶었다.
그러다 좀 걸을 수 있게 되자 산책을 나가게 되었다. 오랜만에 걸으니 걷고 산책하며 신선한 바람을 맘껏 맞을 수 있다는 그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일상을 보내고, 11월인 지금은 무거운 짐을 양손으로 번쩍 들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회복되었다.
이렇듯 인생은 결국 나를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 그리고, 때에 따라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을 준다. 운동으로 무리했던 몸에 휴식을 주듯이 말이다.
인생은 또한 신호를 보낸다. 몸으로, 감정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알려준다. 고관절 통증으로 몸에 휴식이 필요함을, 휴식 없는 무리한 운동은 오히려 독이 됨을, 원하는 것을 그 즉시 얻는 것이 항상 정답이 아님을, 덤으로 둔감해져서 느끼지 못했던 일상의 감사함을 알게 해 준다.
이렇듯 나이 듦은 나를 가르친다. 넘실거리는 인생이라는 파도에 맞서 싸우지 않고, 내려놓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며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만 같다.
원하는 것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하겠지만, 내 영역을 넘어서는 일엔 관여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건 하되, 할 수 없는 건 욕심도 원하는 마음도 내려놓는다.
그렇게 인생의 흐름에 온 몸을 맡긴다. 그냥 믿고 따른다. 나보다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어떤 흐름이 알아서 가장 좋은 곳으로 이끌어 줄거라 믿으면서.
예전보다 흰머리가 더 많이 나고, 노안 때문에 불편하긴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나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나이 듦의 경험을, 내게는 오지 말았으면 했던 이 경험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호기심 있게 나이 듦을 즐겁게 경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