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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비 Aug 09. 2020

안. 어. 키

약 안 쓰고 (호주에서)어른 키우기

이번 주에만 병원비로 200불가량이 빠져나갔다. 기록 경신!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돈을 의사 선생님께 갖다 바친 적이 있었나! 하나가 아니라 둘이 다녀와서 더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많은 건 많은 거다. 어차피 나중에 보험금이 나오지만, 그래도 많은 건 많은 거란 말이다. 분명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간 건데 다녀오고 나면 통장이 아파서 몸의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는다. 어쩌면 이것도 치료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인들은 아파도 병원에 잘 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게 국민성의 일종인지는 모르겠고, 일단 나도 그렇긴 하다. 한국에선 정말 아파서 죽을 것 같은 게 아니면 절대 가지 않았다. 어차피 그러다 엄마한테 아픈 걸 들키면 가게 되기는 했지만. 한국처럼 의료 시스템과 보험이 탄탄한 나라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도 이상하게 병원은 꺼려졌다. 주사를 맞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주사를 무서워하지 않는데도 그랬다. 수많은 민간요법들 덕분일 수도 있다. 나는 배가 아플 때 매실액을 먹으면 나아진다고 배웠다. 발진이 일어날 때는 탱자액을 먹으라고 아빠가 가르치셨다. 어릴 적부터 비염을 달고 살았는데, 내가 먹은 것은 외할머니가 직접 만드신 환이었다. 약간의 꿀 냄새가 나던 그것. 비염은 결국 낫지 않았지만, 다른 것들은 꽤 통했던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배가 아플 때면 집에 있던 매실액 생각을 가끔 한다. 


호주에서는 한국 같지 않다. '아 이건 좀 불안한데...' 싶어야 겨우 병원에 전화를 건다. 통증의 결과가 대수술이 될 수도 있는 경우나 일에 크게 지장이 가게 될 것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더 안 간다는 얘기다... 


호주의 의료 시스템은 한국과 많이 다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번거롭다. 예를 들어 어느 날 갑자기 오른쪽 정강이가 아프다고 해 보자. 마침 며칠 전에 크게 미끄러져 넘어진 것도 생각이 나고, 뭔가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느껴진다. (절대 실화가 아니다) 한국에서라면 그냥 정형외과에 가 보면 된다. 접수만 마치면 진료부터 엑스레이까지 한 곳에서 모두 가능하다. 늦어봐야 한 시간 정도면 내 다리에 이상이 있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있다. 하지만 호주에서는 최소 사흘 정도가 걸린다. 먼저 GP(General Practitioner)를 예약한다. GP는 내 상태를 보고 진단한 뒤, 필요하다면 더 디테일한 검사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연결해준다. 대부분 당일엔 불가능하다. 하루나 이틀 뒤로 예약을 잡고 검사를 한 뒤, 다시 GP에게로 간다. 물론 또 예약을 잡아야 한다. GP는 내가 가져온 사진을 보고 정확한 진단을 해 준다. 장장 사흘의 대장정을 마치고 그제야 모든 진료가 끝이 난다. 그런데 만약 아무 이상이 없다면? 시간이랑 돈을 함께 버린 거지 뭐.


만약 뼈가 아니라 감기 같은 다른 질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행히 이건 절차가 하루에 모두 끝나긴 한다. 그런 종류는 GP의 선에서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거다. 상담실에 들어가면 의사 선생님이 묻는다. 어디가 아파서 왔니? 그럼 나는 대답한다. 감기에 좀 심하게 걸린 것 같아. 한국이라면 수액을 맞고 가거나 약국에서 파는 것보다 조금 더 센 감기약을 처방받을 수 있다. 하지만 역시 호주는 다르다. 아마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래? 그럼 가서 파나돌 먹어. 내가 만약 염증이 있다고 대답하면, 가서 파나돌 먹어. 그리고 푹 쉬어. 편두통이 너무 심하다고 하면, 가서 파나돌 먹어. 그리고 스트레스받지 마. 


파나돌, 파나돌, 파나돌. 파나돌(Panadol) 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나라의 타이레놀 같은 호주의 국민 진통제다. 성분이 우리나라 것보다 순하다고 해서 호주로 여행 온 관광객들이 종종 사 가기도 한다. 호주의 의사들은 감기나 염증, 두통 같은 병들은 대부분 파나돌을 먹으라고 처방한다. 그리고 푹 쉬라는 말은 덤이다. 그냥 들으면 돌팔이 같아도 여기엔 숨겨진 뜻이 있다. 척 봐도 집에서 푹 쉬면 얼마 가지 않을 병들인데, 내가 너한테 뭔가를 더 해주면 너는 그 비싼 돈을 더 내야 하잖니. 그러니까 그냥 파나돌 먹고 쉬어. 다른 의사 선생님들은 몰라도 내가 가는 병원의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걸로 돈 쓰면 아까우니까 차라리 병원 갔다 치고 하루 정도 일 빼고 쉬라는 말도. 감사하긴 한데 한국의 종류별 케어를 받던 내겐 뭔가 아쉽다. 


이러니 호주에서는 병원을 더욱 꺼려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병원에 가면 얼마를 냈더라? 엑스레이까지 찍으면 비싸 봐야 만 오천 원 정도 했던 것 같다. 사실 그때는 엄마가 알아서 해 주실 나이였으니 기억이 잘 안 나기도 하고. 그래도 그리 비싸진 않았다. 호주에서 뼈 문제로 병원을 가려면 최소 200불은 줘야 한다. 우선 GP를 만나는데 회당 50불, 이것도 기본이 10분짜리 상담이다. 대부분이 그 10분 안에 끝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MRI, X-RAY, CT 등 자세한 검사는 그 값이 훨씬 더 뛴다. 대부분 따로 전문 센터에서 운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마 100불? 혹은 그 이상일 것이다. 이러니 내가 통장이 안 아프고 배기냐고.


호주에도 물론 보험이 있다. 비자 별로 들 수 있는 보험이 다르지만 그중 갑은 메디케어(Medicare)다. 영주권 이상만 나라에서 병원비를 보장해주는 보험인데, 나도 정확히 어디까지 커버가 되는 건지는 모른다. 다만 다들 영주권의 가장 큰 장점들 중 하나로 메디케어를 꼽기 때문에 대단한 것은 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안경이나 선글라스를 살 수 있는 돈을 지원해 준다는 것도. 호주에서 병원을 가면, 수납할 때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것이 메디케어 카드가 있는지 없는 지다. 만약 있다면 병원에서 모든 처리를 알아서 해 주지만 내 학생 보험처럼 개인 보험이라면 그냥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이것도 좀 서럽다. 나는 허리가 아플 때마다 주기적으로 도수 치료 병원에 가는데, 이건 회당 70불이나 한다. 물론 외국인 학생인 내 보험은 이런 물리치료 종류를 지원해 주지 않는다. 하하. 부득불 우겨 한국 유학생 보험을 들게 하신 어머니께 감사.


나는 몸이 그리 건강하지 않은 편이다. 이게 선천적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렸을 때 잔병치레를 자주 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성인이 되고 보니 주유소 앞 풍선 인형처럼 흐늘거리는 몸을 가진 사람이 되어버렸다. 몸에 비해 가는 팔에는 당연히 힘이 없고, 몸에 비해 튼튼한 다리도 보기와는 다르게 힘이 없다. 덕분에 J는 종종 나를 '흐접'이라고 부르곤 한다. 히비는 흐접이야! 그럼 나는 분통에 차서 J의 가슴팍을 퍽 하고 때리지만, 타격은 없다. 억울하다. 게다가 어릴 때 못 했던 잔병치레는 요즘 들어서 하고 있다. 조금 오래된 편두통과 위염부터 식도염, 저혈압, 비염, 최근엔 안구 건조증이라는 친구를 새로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인공 눈물을 선물로 줬다. 몸만큼이나 허약한 멘털 덕에 스트레스를 조금 받으면 곧바로 앓아눕는다. 왜, 한국에서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꼭 하는 말이 있지 않나. 밀가루랑 자극적인 음식 멀리 하고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아니 그런데 그게 제 맘대로 되나요? 저도 받기 싫단 말입니다!


어쨌든, J의 표현을 따라 허접인 이 몸으로 살아가기에 호주는 내게 너무도 친절하지 않은 나라인 것은 분명하다. 한국에 있어도 더 아프면 아팠지 덜 아프진 않았을 텐데 (호주의 깨끗하고 건조한 공기 덕에 피부염과는 이별했다) 여기선 똑같이 아파도 훨씬 고생하니까. 아픈 몸 이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는 것도 모자라 정신 차려보면 통장이 반으로 뚝 쪼개져 있다. 며칠 전 우리 집에 놀러 왔던 K 언니는 내가 병원비를 가지고 투덜대자 이렇게 말했다.

야, 너 어른 되면 진짜 서러운 게 뭔 줄 알아? 아플 때 몸 걱정이 아니라 통장 걱정을 하게 된다는 거야.

K 언니는 무려 메디케어가 지원되는 시민권자다. 그런 언니도 이렇게 말할 정도면 호주의 의료 시스템이 얼마나 불친절한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생전 영양제랑은 멀리 하던 내가 여기 와서 내 돈을 주고 오만가지의 영양제를 꼬박꼬박 사 먹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안 아파야 한다. 아프면 나만 손해다. 아프면 나만 서럽다. 특히 이 곳이 아직 내 나라가 아닐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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