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마음을 고정시키다

브로콜리너마저 - 윤덕원

레코드폐허에 참여했을 때가 그랬다.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돌발적으로 발매하거나, 때론 함량 미달의 작품이더라도 선보이는 행사였는데, 그때 나는 초기부터 작업했던 데모 음원을 CD에 복사해서 100장 정도 판매했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신나서 했던 것 같은데, 과정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역시 일기를 써야 했다.

돌이켜보니 '그때가 아니면 글로써나 음악으로써 고정하기 어려운 생각이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글이나 음악, 혹은 이미지로 고정하지 않은 마음을 이후에 다시 꺼내어 고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한 번 고정한 것은(수정이 필요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다시 불러올 수 있다. 일기의 의미도 그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브로콜리너마저의 세계관을 담당하고 있는 윤덕원이 최근 첫 산문집을 냈다. <<열심히 대충 쓰는 사람>>. 그는 매일 일기를 쓴다고 한다. 그 시기에 기록되지 않으면 지나쳐버리는 마음들이 있어서. 그래서 꺼내서 고정해둔다고 한다.

출처: 연합뉴스

나는 브로콜리너마저의 곡들과 함께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그리고 사회 생활을 나고 있다. 그가 기록해둔 노래들 덕분에, 나 또한 그와 함께 고정해둔 마음들이 있다. 그중 '졸업'이란 곡은 특별하다. 시기마다 고정해둔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3학년, 졸업식마다 '졸업'을 무한 반복해서 들었다. 친구들과 이전의 관계를 이어나가지 못할 거란 생각에, 가사를 곱씹어볼 새도 없이 어렴풋한 아쉬움과 아련함을 느꼈을 뿐이다. 그러나 30대에 들은 '졸업'은 달랐다.

그 어떤 신비로운 가능성도
희망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청년들은
쫓기듯 어학연수를 떠나고

꿈에서 아직 덜 깬 아이들은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날 듯
짝짓기에 몰두했지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 (...)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을 믿지 않을게


가사의 현실 고증이 너무나도 뚜렷했기 때문이다. 내가 비판하던 사회상이 정말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현실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위에 적은 가사의 첫 문단만 읽어도 나는 심장이 단전 아래로 떨어지는 것만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미친 세상을 믿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 미친 세상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사실 그것뿐이라 깊은 무력감에 빠지곤 한다.


윤덕원의 가사를 듣고 있으면, 내가 무심히 덮어두던 마음의 진심과 내가 살아가는 사회가 한 줄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평소엔 거리를 두는 태도로 사회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노래를 듣는 순간 그 사회를 향한 나의 생각이 실은 내 가장 깊은 곳의 울림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때, 나는 비로소 내가 사회를 이야기할 때의 ‘감정’을 본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듣는 일은 세상을 해석하는 동시에, 그 사회 속에서 느끼는 나 자신을 이해하고 마주보는 일이 된다.


서론이 길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선 사람들의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윤덕원의 삶을 알아보고자 한다.


윤덕원은 공부를 곧잘 하는 창원의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도전! 골든벨」에 출연해 최후의 1인까지 올라 50번 문제까지 갔다. 음악에 대한 관심도 두각을 드러냈다. 고등학교 시절 유재하, 유희열, 동물원과 같은 서정적 한국 가요를 좋아했다. 반 친구들 앞에서 양희은 노래를 부를 만큼 음악 감수성이 또렷했다. 책이나 학원에서 기타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절 음악을 접하는 정도는 겨우 공교육 테두리 안에서. 2001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외국어 영역 1문제를 틀려 400점 만점 중 398점으로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 후에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노래패 동아리 메아리에 가입했다. 여기서 처음으로 제대로 기타 합주를 배웠다고 한다. 당시는 1997년 IMF 외환 위기 이후 인디 씬과 민중가요계가 요동치던 시기였다. 메아리는 7080 민중가요의 형식·정체성을 토론하면서, 탈정치화의 흐름 속에서도 당대 청년의 언어로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를 두고 밤새 논쟁했다. 98학번(이자람, 이정수/이기타, 조병진, 안승현 등)이 밴드 스타일 창작곡을 당겨온 뒤, 01~02학번 무렵(윤덕원 세대) 한 차례 더 변화가 온다. 홍대 씬의 영향으로 중창 중심에서 밴드 포맷으로의 전환했고, ‘좋은 노래’가 어떤 형식으로든 나와야 한다는 합의가 싹튼다. 어쨌거나 그는 자신의 학번을 '시위에서 경찰들에게 쫓겨봤던 마지막 세대'로 기억한다.


이후 그는 음악 활동을 구조화하기 시작한다. 축제와 음반 제작이라는 정식 활동에 뛰어든다. 그는 2003년 ‘축제하는 사람들(축하사)’에 참여하면서, 당시 예산 100만원으로 전통적 대학축제와 다른 도발적 형식으로 파장을 만들었다. 덕원은 당시 동료들에게 “기획의 천재”로 불릴 만큼 새로운 판을 짜는 감각이 있었다. 군대 전역 이후 '깜악귀'가 스누나우(SNU now)를 중심으로 구성한 합작 앨범 '밴드 밴드 짠짠'에 3집(2004~2005년)부터 그린티바나나라는 이름으로 참여한다. 학생 생협이나 '그날이 오면'과 같은 로컬서점의 유통망을 뚫으며 직접 앨범을 판매했다. 수공업 소형음반이라도 정식 유통·검색 체계 속에 올려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강했다.


그때 윤덕원은 ‘관악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고 느꼈다고 한다. 당시 인디음악의 중심이자 상징적 공간이었던 홍대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런 변화에는 주변의 움직임이 있었다. 2002년, 깜악귀가 결성한 눈뜨고코베인이 홍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2004년에는 보드카레인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이때 관악청년포크협의회가 윤덕원을 홍대로 이끄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핵심 인물 중 하나였던 '9와 숫자들'의 송재경은 이미 홍대 앞에서 활동하며, 녹음과 레코딩 기술, 그리고 음악적 감각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다. 그의 존재는 관악에서 만들어진 음악이 단순한 ‘학교 노래’나 ‘동아리 공연’의 범주를 넘어설 수 있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었다. 실제로 관악청년포크협의회는 홍대에서 몇 차례 공연을 열었고, 예상보다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2005년 윤덕원은 새로운 시도를 꺼내놓는다. 그것이 바로 붕가붕가레코드였다. 당시 그는 이 조직을 ‘사업체’라 부르기를 주저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음악을 ‘출판’하듯 다루려는 진지한 시도였다. 윤덕원에게 이 구상은 단순한 취미나 실험이 아니었다. 중산층 출신의 홍대씬의 대학생들과 달리 그는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었다. “음악을 하더라도 돈을 까먹어서는 안 된다”는 현실적인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음악 그 자체만이 아니라, 음악을 가능하게 하는 제작·유통·비용 구조까지 고민했다. 그는 그것을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이라 불렀다. 프레스비가 부담되면 CD를 공CD로 구워서 팔았다. 규모는 작았지만, 멈추지 않는 방식이었다. “음악을 하고 싶다면, 시스템도 같이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이 그를 움직였다. 그렇게 붕가붕가는 ‘로우파이한 생존기술’과 ‘자기기획의 미학’을 결합한 독립적 모델로 자리 잡았다. 윤덕원에게 이 시기는 단순한 음악적 성장기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만들어가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그는 낭만보다는 구조를, 재능보다는 지속을, 영감보다는 공정을 믿었다.


이후 브로콜리너마저의 탄생.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 윤덕원의 머릿속에는 이상하게 흥얼거리던 멜로디 한 줄이 맴돌았다. 그게 바로 훗날 ‘꾸꾸꾸’가 된다. 그는 이 곡을 완성하고 싶었다. 당시 관악에서 쌓아온 자작곡 경험과 붕가붕가 시절의 감각을 결합해 새로운 밴드를 꾸렸다. 밴드의 첫 무대는 MBC 대학가요제 예선이었다. 하지만 ‘반주 녹음’을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한다는 규정을 모르고, 생악기만 들고 무대에 올라갔다. 결국 허공을 치는 기타 연주와 빈 페트병을 두드리는 드럼으로 공연을 대신해야 했고,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밴드의 상징적 출발점이 되었다. 윤덕원은 훗날 “그때의 허술함이 오히려 우리의 정체성을 만든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즉흥성과 진심, 그리고 부족함을 창의성으로 바꾸는 능력—그것이 브로콜리너마저의 시작이었다.


그 후 윤덕원은 직접 집에서 녹음한 음원으로 EP '앵콜요청금지'를 제작했다. 공CD를 복사하고, 직접 디자인한 패키지를 하나하나 포장해 온라인 서점과 독립음반점에 유통시켰다. 그 ‘수공업 소형음반’은 오히려 진정성과 독립성의 상징이 되어 입소문을 탔고, 소셜미디어와 블로그를 통해 퍼져나갔다. 당시 인디 음악의 다수는 공연 중심으로 소비되고 사라졌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을 ‘자료’로 남기고 싶다는 욕망을 가졌다. 그렇게 ‘유자차’,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같은 곡들이 청춘의 언어로 자리 잡으며, 브로콜리너마저는 ‘인디계의 국민밴드’로 불리기 시작했다.


윤덕원의 앨범 세계는 그의 나이테에 맞는 경험과 생각들을 담는다. 산문집 《대충 열심히 쓰는 사람》에서 그는 “수제비를 빚듯 가사를 쓴다”고 말했다. 마음이 수제비 속이라면, 가사는 그 표면과 같다고. 드러날 듯, 드러나지 않을 듯. 그의 노랫말은 바로 그 얇은 경계 위에서 태어난다—직설을 피하면서도 정직하게, 감정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강요하지 않는 방식으로.


정규 1집 〈보편적인 노래〉(2008)는 ‘보편성’이라는 말 그대로, 평범한 일상과 감정의 미세한 결을 정확히 포착했다. 스쳐 지나갈 법한 부끄러움, 말하지 못한 마음, ‘괜찮다’라는 말의 공허함을 노래하며, 청춘이 마주한 감정의 미묘한 온도를 담백하게 언어화했다. 2집 〈졸업〉(2010)에서는 그 시선이 보다 사회로 향한다. 개인의 불안이 사회적 불안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3집 〈속물들〉(2019)에서는 한층 성숙한 자기 고백이 등장한다. “그래, 우리는 속물들 / 어쩔 수 없는 겁쟁이들”이라 말하며, 인간의 속물성을 부정하지 않고, 다만 “최악은 되지 말자”는 선(線)을 긋는다. 그의 음악은 무너져가는 시대 속에서도 최소한의 양심과 품격을 지키는 태도를 이야기한다.

출처: 한겨레

이러한 윤덕원의 사회관은 일관되게 ‘양심의 최소선’을 지키는 쪽에 서 있다. 그는 2016년 민중총궐기 행진 장면에 자신의 곡 '졸업'을 덧붙인 영상을 공개했다. 이 기록은 노래가 현실의 증언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라는 가사는 뮤직비디오 속 구의역, 세월호와 같은 사회적 비극의 이미지와 겹치며, 기억과 윤리의 경계선을 다시 그어낸다.


홍익대학교 청소노동자 해고 사태 당시, 총학생회가 “비운동권”을 이유로 연대를 거부했을 때 그는 단호했다. “패배를 피하는 정도를 넘어, 그건 보신주의에 가깝습니다. 비겁합니다.” 그에게 ‘학습권’이란 책상 앞의 권리가 아니라, “현장에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서 배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청소노동자들을 위한 지지 공연과 후원 콘서트 제안에 망설임 없이 “물론이죠”라고 답했다.


그에게 사회적 실천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개인적 울림이었다. 그는 공정무역 후원 공연이나 참여연대 무대에 기꺼이 서지만, 정당정치에는 신중하다. 사회 구조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음악을 ‘정치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음악을 ‘감정의 촉매’, 즉 듣는 이의 감정이 반응을 완성하는 매개로 여긴다. “음악은 소통의 매체가 아니라, 듣는 이의 감정이 반응을 완성하는 촉매”라는 그의 말은, 예술가로서의 실천적 태도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낸다.

'졸업' 뮤직비디오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 사회에 짓눌린 마음으로 하루를 버티고 있다면, 브로콜리너마저의 노래를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의 노래는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꾸려는 그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대신 그 속에서 무너지지 않으려는 마음의 언어다. 윤덕원이 지켜온 선(線)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위로받고 있다.


브로콜리너마저 '바른 생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방 안에만 있었지

정확히 말하면

모든 것을 피해

도망가는 마음으로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던 날들

답답했던 긴 시간 동안

나는 나를 돌보지 않음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

그런 건 아무 의미 없는데


밥을 잘 먹고 잠을 잘 자자

생각을 하지 말고

생활을 하자

물을 마시고

청소를 하자


그냥 걸어가다 보면


아름다운 풍경도

잊혀지는 것도 있어

아름다운 풍경도

또다시 나타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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