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투쟁>,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지난 주말, 고구마 튀김을 해 먹으려고 재료를 준비하던 중에 튀김가루 겉봉 뒷면에 적힌 원산지 표시에 눈길이 갔다. 제품명엔 분명 ‘우리밀’ 튀김가루라고 돼 있었는데, 정작 원재료명과 함께 적힌 원산지엔 ‘옥수수전분: 러시아, 헝가리, 세르비아 등’ 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튀김가루로 고구마 튀김을 하면서, 생전에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하셨다던 고 백남기 선생, 2003년 칸쿤에서 열린 WTO 회의에 항의하다 돌아가신 이경해 열사를 떠올렸다.
칸쿤은 미국에 체류중인 한국인들이 휴양지로 참 많이 찾는 멕시코의 휴양 도시다. 미국 체류 기간 동안 주변 한인들이 칸쿤에 놀러 간다고 할 때마다, 그 곳에서 쓰러진 한국인의 처절함이 떠올랐지만 한 번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남들 놀러가는 데 괜히 초치고 싶지도 않았지만, 마냥 ‘잘 다녀오라’고 말하기도 불편한, 그런 곳이었다. 칸쿤, 아니 실은 멕시코 전체가 그러했다. 멕시코에는 생존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려는, 그러다 높은 담장에 막히거나 체포되어 구금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겨우 미국으로 들어와 숨어 살다 추방되는 사람들 또한 많았다. 많은 미국인들이 그런 멕시코인들을 싫어했고, 미국인들 사이에는 ‘몰래 숨어 들어와 체류하면서 현금을 받는 직종에서 불법으로 일하고, 미국 복지수당 받고 좋은 집과 좋은 차를 소유한 멕시코인들’에 관한 ‘카더라’가 떠돌아다녔고 그게 아시안인 내 귀에까지도 날아와 꽂히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시안들은 ‘미국에서 가깝고 저렴한 휴양지’라는 이유로 칸쿤을 즐겨 찾았다. 아시안들은 미국과 멕시코를 가르는 국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없었고, 미국인들은 국경에서 일어나는 일은 애초에 미국의 책임이 크다는 걸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멕시코에는, 토착민 저항운동의 상징인 사빠띠스따가 있다. 멕시코 치아빠스 주 토착민들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로 인해 그간 공유지였던 땅을 빼앗기고 생존이 위협 받는 상황이 되면서 그에 항거해 일어난 운동. 사빠띠스따 운동에는 특히 여성의 역할이 크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막을 몰랐다가 이번에 이 책을 읽고 관련 내용을 찾아보면서 조금 알게 되었다. 특히 이 책에도 소개된, 여성혁명법(Women’s Revolutionary Law)이라고 불리는 것의 내용은 정말로 ‘혁명적’이라 할 만했다. “노동할 권리, 공정한 임금을 받을 권리, 교육받을 권리, 기본적인 의료 보장을 받을 권리, . . . 결혼을 강요받지 않고 동반자를 선택할 권리, 가족 안이든 밖이든 폭력에 시달리지 않을 권리”(p.212). 이런 조항들을 치아빠스 토착민 공동체 내부의 노력과 풀뿌리 논쟁을 바탕으로, 여성들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마리아 달라 코스따는 이 사빠띠스따 운동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과 그 역할을 보며, 토착민 여성 운동의 함의는 ‘관계’에 대한 성찰에 있다고 말한다. 도시의 남성 지식인들과 달리, 토착민 여성 운동은 “다른 생명체들과 애정 어리고 존중하는 관계를 맺는 문제”(p. 245)에 가닿기 때문이다.
책에는 ‘닐레니 선언’이라는 것도 언급되는데, 이 닐레니 선언은 18세기에 농업기술을 널리 보급한 전설적인 여성 농민, ‘닐레니’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닐레니 선언은 식량주권을 옹호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 식량주권은 현재 초국적 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식량체계에 맞서 지역적 생산자들을 중심에 둔 식량, 농업, 소목축업, 어업 체계의 방향과 전략을 제시한다. 식량주권은 지역, 국민경제와 시장을 우선시키고, 농민과 가족농이 추구한 농업, 어민, 목축인과 환경적 사회적 경제적 지속성을 토대로 한 식량생산, 공급, 소비의 권한을 부여한다. . . . 식량주권은 남녀, 민중, 인종, 사회계급, 세대 간의 불평등과 탄압이 없는 새로운 사회관계를 의미한다.” (다음 링크에서 발췌: https://nyeleni.org/spip.php?article333)
농사는커녕 화초 하나 제대로 길러내지 못하는 나지만, 세르비아에서 온 옥수수전분이 들어간 ‘우리밀 튀김가루’로 고구마튀김을 하고 칠레에서 온, 껍질째 먹는 포도를 사 먹을 때, 어떻게 길러지고 도축됐는지 뻔히 아는 육고기를 사가지고 와 조리할 때,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자세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우루과이 라운드며 WTO며 하는 것들 때문에 한국의 농민들이 어떤 상황을 겪어왔는지 알기에, 튀김가루 한 봉지, 칸쿤이라는 지명 한 번에 그분들을 떠올려 죄스러워 한다. 이 불편함, 이 죄스러움을 그저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어떤 액션을 취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단순히 어떤 행위를 하고, 어떤 행위를 하지 않는 ‘선택의 문제’를 넘어서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인 것 같다.‘지금 같은 구도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효율적이면서도 윤리적으로 살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같은 구도를 깰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페미니즘의 투쟁’은 바로 그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