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러미 프로젝트>
“. . . 만약 다섯 살 짜리 아들애가 자라서 게이가 되면요? 걔가 자기 아버지가 자길 미워할까봐 겁내지 않았으면 해요. 난 정말 괜찮다고 어떻게 알려줄 수 있을까요?”(p.143)
언젠가 지인과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위의 인용문과 서두는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결론으로 나아가는 한 마디를 들은 적이 있다. 아이가 나중에 동성애자나 무슬림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므로, 어릴 적부터 (부모) 본인이 옳다고 믿는 종교를 갖게 해주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그이의 결론이었다. 말문이 막혔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에 관한 한, 설득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건 그 때나 지금이나 같다. 다소 무책임한 것 같아 보이지만, 내겐 종교를 방패삼는 이들을 상대할 무기가 없다.
어제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행사에 일부나마 참여한 뒤, 도서관에서 집어 든 책이 이 문제와 관련된 책이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처음엔 그저 래러미(Laramie)라는 미국의 지명, 그리고 꼭 제본 뜬 책 처럼 보이는 책의 외양이 눈에 띄었는데, 뒷표지에 적힌 첫 두 문장을 읽는 순간 숨이 막혔다.
“1998년 미국 와이오밍 주의 래러미에서 살해사건이 발생했다. 두 명의 가해자에게 구타와 고문을 당한 동성애자 매슈 셰퍼드는 도시 외곽의 울타리에 묶인 채 발견되었고 엿새 뒤 사망했다.”
이 책에는, 이 사건이 벌어진 래러미의 마을을 찾아가 주민들을 인터뷰한 것을 바탕으로 쓰여진 희곡 두 편이 실려 있다. 첫 번째가 <래러미 프로젝트>, 두 번째가 <래러미 프로젝트: 십 년 후>다. 두 작품 사이에는 십 년이라는 시간 간격이 있는데, 그 사이에 이 사건은 동성애자 대상 ‘증오범죄(hate crime)’에서 ‘약물문제(drug problem)’으로 바뀐다. 남성 동성 간의 사랑을 그린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의 배경이기도 한 래러미에서, 동성애자가 처참하게 살해된 사건이 ‘약물판매상과 중독자 간의 다툼’으로 바뀌어 구전되기 시작한 데는 ‘우리 그런 사람 아니다’ ‘우리 동네 그런 동네 아니다’ 하고 주장하고픈 사람들의 심리가 반영돼 있었다. “래러미는 동성애를 혐오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도 있겠죠. 그렇지만 우린 동성애를 혐오하는 마을이 아니에요.”(p.161)
이런 대목들은 앞서 나온 그 지인과의 대화나, 지금도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들을 떠올리게 했다.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자신이 누군가를 혐오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소수자 문제를 대할 때 많은 이들이 다소 방어적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퀴어 퍼레이드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성소수자를 차별하자는 게 아니라…” 라는 말은 “(나는 그런 걸 혐오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굳이 그런 얘길 내 눈 앞에서 해야겠느냐, 저기 다른 곳에 가서 해라, 그건 말리지 않는다”라는 말과 같다고,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건, 그들이 말하고 싶어 하는 바와는 달리, 실은 혐오의 말과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섯 살 아이가 나중에 게이가 되면 어쩌느냐고? 어쩌긴 뭘 어쩌겠는가. 그게 아이의 삶이라면, 부모가 받아들이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아이의 삶일 뿐이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맨 앞의 저 인용문에 나온 것 처럼,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 가장 먼저 부모를 찾아 겁내지 않고 말할 수 있도록 ‘안전한’ 존재로서 거기 있어주는 것, 그뿐이다.
“혐오는 무지와 공포로 만들어진다. 모른다고, 무섭다고 몰아낸다면 우리의 세계는 점점 좁아질 뿐이다. 동성애자는, 양성애자는, 트랜스젠더는, 여성은, 장애인은, 결혼이주여성과 그 자녀들은, 비장애인이나 남성이나 이성애자와 마찬가지로 이 사회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원이자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은 국민들이다. . . . 자신과 같은 삶을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기억되는 상징이 된다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이제 우리는 죽음으로, 체포와 형벌로 소수자를 기억해서는 안 된다.”(209)
더 이상의 죽음은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렇게라도 그이들의 곁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