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 자고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려고 침대를 벗어났는데 어마어마한 통증이 밀려와서 변기통까지 다리를 질질 끌며 가야 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고민했다. 오늘 하루 쉴까, 우회로를 타서라도 걸어 볼까... 고민을 하고 또 하다 10시 반이 넘어 버렸다.
믿을 건 파스뿐
일단은 걷는 도중에 해가 떨어지더라도 천천히 쉬엄쉬엄 걸어보기로 했다. 자전거길을 따라가면 33km인데 네이버 지도에서 알려주는 최소 도보 경로를 걸으면 24km. 칠현리까지는 자전거길 대신 최단경로로 걷자는 결론을 내렸다. 가는 길에 산이 있는 듯하니 무리해서는 안 된다.
아픈 곳에 파스를 붙이고 발목보호대와 무릎보호대도 장착했다. 어제 산이 그려져 있는 양말을 신었더니 사진에 귀엽게 나와서 오늘도 신겠다며 힘든 와중에도 손빨래해놓고 잤는데, 발목보호대를 하니 양말이 다 가려져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일단 아침밥을 먹으러 갔다. 단백질과 탄수화물 둘 다 든든하게 챙길 생각으로 닭칼국수집에 갔다. 미니보쌈은 맛있었지만 칼국수는 간도 그냥저냥이고 살코기도 너무 적어서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점심으로 먹을 왕만두를 포장해서 가게를 나왔다.
출발하기 전에 간식봉지를 좀 채워둬야겠다 싶어 편의점으로 갔다. 200m도 안 되는 거리였는데 걷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릎이 여전히 아팠고 오른쪽 고관절도 통증이 심해 다리를 절면서 갈래도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천천히 걸어도 무조건 부상이다 싶었다. 결국 나는 하루 쉬어가기로 결정을 내린다. 낯선 이곳 남지에서.
휴식을 결정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지도에서 마사지를 검색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눌러앉을 생각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지친 근육을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회복해야 했다. 뭐가 있을까 했는데 뜻밖에 두 군데나 뜬다. 하나는 중국 마사지, 하나는 안마원.
안마원이라니 이름이 뭔가 수상하다. 중국마사지, 태국마사지는 많이 받아 봤지만 안마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내부 사진이나 정보도 딱히 없는 와중에 방문자 후기가 하나 있다. '만져보고 상태가 어떤지 아실 정도로 잘하세요.'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길래 정찰 겸 한번 찾아가 보았다. 간판과 문 시트지는 최근에 했는지 제법 깨끗하다. 국가 공인이라니 왠지 신뢰도 간다. 하지만 여전히 겁이 나서 살금살금 한번 올라가 보았다.
뜻밖에 한의원과 비슷한 실내. 조심스레 문을 열어 보니 리셉셔니스트인 듯한 아주머니가 나오신다. 예약이 있어서 당장은 못 하고 5시에는 가능하단다. 그럼 그때 오겠노라고 예약을 걸어 두고 돌아 나왔다.
예약한 모텔의 입실 시간은 16시. 4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남지구경도 좀 하고 카페에 앉아 글도 좀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지도에 카페를 검색해 보니 생각보다 개수가 많다. 가장 가까운 데다가 제법 갬성 인테리어가 갖춰진 듯한 카페를 발견해서 절뚝절뚝 걸어가 보았다.
<리얼> 딸기 라떼라니! 심지어 밀양 농장직송 딸기! 먹어서 혼내주겠다는 마음으로 두근두근 설레며 들어갔는데 자그마한 가게에 독서모임이라도 하는지 사람이 가득 차서 앉을자리가 없었다. 테이크아웃을 할까 했지만 앉아있을 자리가 필요했고 밖은 쌀쌀했기에 아쉬운 마음을 안고 밖으로 나왔다.
앞으로 파스가 매우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 보급을 위해 약국에 들렀다. 파스를 달라고 했더니 젊은 약사가 매대를 가리키며 파스는 이쪽이란다. 무슨 온 세상 파스를 다 갖다 모아놓은 양 종류가 엄청나게 많다. 하나 추천해 달라고 하니 이게 모든 방향으로 잘 늘어나서 아무 데나 붙이기 좋다며 하나를 건네주신다. 깊게 고민하는 대신 약사의 추천을 신뢰해 보기로 했다.
걷다가 '남지붕어빵아저씨의 소확행'이라는 집을 마주쳤다. 겨울에 붕어빵을 절대 그냥 지나치치 않는 나인데 거기에 이목을 끄는 상호명까지, 안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아주머니 세 분이 붕어빵은 안 사 먹고 포장마차 안에 서서 수다를 떨고 계셨다. 붕어빵이 한 개는 칠백 원 세 개는 이천 원. 붕어빵 두 개를 주문했다.
"왜 3개 안 하고 2개 하나? 팥 많이 들어서 맛있다 3개 해라."
"3개 먹으면 배부를 거 같아서요!"
"아이고 그래도~ 언니야 얘 봐라 2천 원 내고 2개 먹는단다."
"냅 도라 2개 1400원 내고 무면 되지"
"아 맞나... 언니 머리 치아라 계좌번호 가린다"
"니 여 사람 아니제? 어디서 왔나?"
"저 수원 사는데 부산에서 걸어서 왔어요~"
"부산서 글으왔다고? 아이고야.. 으디까지 가는데?"
"저 인천까지 가요~"
"인천까지 간다꼬? 아이고야... 아가씨가 대단하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마침 나온 붕어빵을 받아 들었다. 이만 가보겠다며 인사드리니 공중에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응원의 사자후를 질러주신다.
"응 조심히 가고! 화이팅!!!!!!!!!!!!!!!!!!!!!"
"야야... 나는 남지 안에서 글으라고 해도 싫은데 (깔깔깔)"
엄마와 이모들이 생각나는 응원이었다. 그나저나 나 지금 말 한마디에 외지인 티가 잔뜩 나는 머나먼 타지에 와 있구나. 새삼 신기하고 재미있다.
딸기라떼를 먹고 싶어서 다른 카페를 찾아왔다. 커뮤니티센터 비슷한 목적으로 지역사업자들에게 상가 한 칸을 임대해 주는 듯한 건물이었다. 홀 가운데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고 빙 둘러 지역특산물을 파는 가게나 공방들이 영업 중이었다.
받아 든 딸기라떼를 한입 쪽 빠는 순간 느꼈다. 아, 잘못된 선택이었다.
아무래도 흰 우유 대신 딸기우유가 들어간 모양이었다.나는 딸기라떼는 없어서 못 먹지만 딸기우유는 좋아하지 않는다. 으깬 딸기의 새콤함과 흰 우유의 고소함이 만나 이루는 조합을 좋아하는 것이지 딸기우유의 묘한 핑크색 맛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딸기라떼에 딸기우유를 쓰다니! 순대국밥을 시켰는데 잡채순대만 잔뜩 들어있는 뚝배기를 받은 기분이었다. 딸기우유도 잡채순대도 그대로 먹는다면 모를까 재료로 사용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요.
과육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딸기청 부분만 쪽쪽 빨아먹으며 그간의 사진을 정리하고 글도 조금 썼다. 한구석에 위치한 놀이방에서 어린이 둘이 꺅꺅대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 여기서 충격 포인트는 그들이 핸드폰에 영상통화를 켜 놓고 다른 공간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놀이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친구 집에 놀러 가기'가 옛말이 되는 날이 올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방앗간에서 풍겨 나오는 풍성한 참기름 냄새, 쌀집 평상에 드러누워 달게 낮잠을 주무시는 할머니들, 모종 파는 가게와 농기구 고치는 가게들... 이곳이라 볼 수 있는 낯설지만 인간적인 장면들이었다. 국토종주가 아니었다면, 무릎 부상이 아니었다면 이곳 남지읍은 평생을 살아도 와볼 일이 없는 곳이었겠지.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덕분에 재미있는 하루를 보내게 됐다.
그렇게 맛없는 딸기라떼를 먹고 하루를 마무리하기엔 아쉬워 입장 실패했던 카페에 다시 와 봤다. 모임이 끝났는지 아까 가게를 가득 채웠던 사람들은 사라진 채였다. 기쁜 마음으로 밀양 농장 현지직송 딸기라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카운터에서 딸기라떼 만드는 법을 전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앳되어 보이는 직원이 사장님의 지시에 따라 딸기를 자르고 우유를 부었다. 이내 등장한 새하얀 딸기라떼. 별 기대 없이 한 모금 마셨는데 이럴 수가, 너무나도 맛있다.
일단 딸기 자체가정말이지 훌륭했다. 과육도 단단하고 맛과 향이 새콤달콤하니 아주 진해서 존재감이 대단했다. 이래서 밀양딸기 밀양딸기 하는구만. 딸기를 몇 알이나 썰어 넣은 건지 씹어도 씹어도 씹을 게 남아 있어서 마시는 내내 즐거웠다. 그래, 딸기라떼란 자고로 이런 식이어야지!
예약해 둔 모텔 입실 시간이 되어서 체크인하러 갔다. 남지에 있는 것들 중 제일 깨끗해 보이고 자전거 국토종주자들이 좋은 평을 남긴 곳을 골랐다. 만족스러운 숙박이었지만 여러모로 수상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일단 이름부터가 '러브홀릭'이다. 도시에서였다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네이밍 센스다.
카드키 아니고 '열쇠'로 방문을 잠그는 시스템 너무 오랜만이라 잠시 정겨움의 시간. 이건 뭐 새롭지도 않다. 국토종주 하는 내내 열쇠로 방문 여는 숙소에서 많이 잤다.
또 다른 대환장 포인트는 부서져서 손가락을 구멍에 넣어 켜고 꺼야 하는 조명 스위치였다. 욕실등 스위치만 처참하게 부서진 걸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전기 절약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왜, 그냥 켜놓고 나와도 되잖아요.스위치 따위 동작만 하면 고치지 않겠다는 스웩 넘치는 운영원칙이 엿보인다.
지방 모텔 담배냄새는 국룰인가. 아무튼 대단히 정겨운 모텔이었다. 들어왔을 땐 좀 추웠는데 난방 돌아가니 몇 시간 뒤에 따뜻해졌다. 예약해 둔 시간이 다 되어서 안마원으로 향했다.
낮에 왔던 안마원에 들어가니 안마사 아저씨께서 맞아 주셨다. 그제야 알았다. 이곳이 맹인안마원이라는 사실을. 한국에서 마사지는 불법이고 자격이 있는 맹인안마사들만 안마를 할 수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뜻밖으로 인생 첫 번째 맹인안마를 받아보게 됐다.
따듯하고 어두운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시키는 대로 엎드렸다. 그냥 조용히 누워서 마사지만 받고 갈 작정이었는데 엄마와 또래라는 안마사님이 너무나도 흥미로운 분이셔서 차마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시길래 수원에서 왔다고 하니 젊은 시절에 무궁화호를 다섯 시간씩 타고 다니며 수원 사람과 장거리 연애를 했는데 인연이 안 닿아 헤어졌다며 썰을 풀어주셨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걸으면서 멧돼지를 만날까 봐 무섭다고 했더니 멧돼지는 꽹과리 소리를 싫어하니까 찾아서 틀라고 팁을 주셨다. 친구분들이 사냥을 해서 종종 고기를 가져다준다는데 그마저도 암컷 멧돼지만 먹을 수 있고 200kg가 넘는 큰 개체나 수컷 멧돼지는 질겨서 못 먹는다고 한다. 멧돼지를 사냥하신다고요?! 하니 동호회나 허가 있는 사람들은 경찰서에 총을 맡겨 두어야 하고, 경찰에서 의뢰를 하면 그때 몰이를 해서 잡는다고, 가죽이 질겨서 한 번 쏴서는 잘 안 죽고 잡힌 걸 보면 정수리에 구멍이 두세 개 뚫려 있다고 하신다. 쇄골이 급소니까 쇄골을 쏴야 한다는 팁까지.
걸으면서 본 고요한 논밭에 대해 얘기해 드리니 농사짓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논밭에 사는 것은 아니고 여기 남지 같은 곳에 살면서 차를 타고 출퇴근한다고 알려 주셨다. 아니 그런 비밀이. 함안과 창녕에는 어떤 농작물을 주로 심는지부터 시작해서 요즘 경기가 좋지 않아서 체감하는 변화들이 어떤 게 있는지까지 별의별 얘기를 다 했다.
어디 외출하셨던 건지 아까의 리셉셔니스트 아주머니가 안마를 받는 동안 돌아오셨다. 내가 마지막 타임인지 저녁으로 라면을 끓이기 시작하셨다. 이내 안마를 마친 안마사 아저씨께서 같이 먹고 가겠냐고 물으셨는데 대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순간 염치 불고하고 "네!" 할 뻔했다. 실례인 것 같아서 한 번은 거절했는데 한번 더 권하셨으면 아마 그 자리에 눌러앉아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 물어보고 넘어가셔서 그냥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리셉셔니스트 아주머니가 나가는 나를 배웅해 주셨다. 한 시간 훨씬 넘게 하셨네, 선생님이 나래씨를 좋게 보셨나 봐~ 하고 얘기하시길래 시간을 보니 정말 예상한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이렇게 감사할 데가. 국토종주 중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시고 "나도 언젠가 하고 싶은데, 연락처 알려주면 전화할게요!" 하신다. 친절하고 멋지고 재미있고 도전 정신 넘치는 두 분께 인사를 드리고 안마원을 나왔다. 걱정이 무색하게 정말이지 알차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낙지볶음을 포장해서 들고 왔다. 점심에 먹으려고 포장했다가 차갑게 식은 김치만두가 있어서 함께 먹었다. 김치만두는 맛있었고 낙지볶음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리는 여전히 아프지만 아침보다는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좀 더 나아지기를, 내일은 여정을 이어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