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월 May 31. 2020

아파도 힘껏 살아가는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이주현


아파도 힘껏 살아가는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책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이미지 출처 yes24)


 언론사 기자 이주현이 사막의 낮과  같았던 조증과 울증의 시기를 보내고 비로소 평범한 행복을 찾기까지의 시간을 기록한 에세이다. 2001  조울병 발병부터 2006 재발까지, 그리고  번의 작은 조울의 파고를 넘기고 휴전 상태를 유지하기까지 20 ,  뜨겁고 차가웠던 성장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저자는 20 중반 나이에 현실과 광기 사이 좁은 틈에 끼어 심연을 바라보았고, 넘쳐나는 감수성과 창의성, 자발성을 경험한다. 그다음에 찾아온 우울의 바닥에서 죽음의 커튼을 들출 뻔하며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깨달아간다. 정신과 폐쇄병동에   입원한 일과 병원 생활, 그리고 복직. 평범한 삶을 향한 욕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사랑의 으로 희망을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가장 신뢰할  있는 의사를 만나고, 가족, 친구, 동료들의 끊임없는 지지와 응원에 살아갈 힘을 얻는다. 걷기와 달리기, 여행으로 순수한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열심히 돌본다. 일렁이는 우울과 불안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출처: 한겨레 출판사 네이버 블로그)







저자는 조울병을 사막에 비유한다. 왜 사막일까.

그가 쓴 프롤로그를 읽고 단번에 책을 샀다. 거창하게 말하는 걸 싫어하지만 어떤 책은 그렇게 운명적 순간처럼 온다. 아껴두고 싶은 마음과 끝까지 단숨에 읽고 싶은 마음을 함께 품으며 한자 한자 읽었다. 결국 책을 사고 그 다음날 새벽 아침까지 완독한 뒤 나는 부은 눈으로 잠에 들었다.

최근 글을 쓰다가 말다가 하며 사춘기 아닌 사춘기를 겪었다. 단순히 게으르고, 나태하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같아 내 스스로 자책이 컸다. 마음의 스트레스는 금세 몸과 연결되어 각종 이유모를 잔병치레로 신호를 보낸다. 그런 상태에서 이 책을 만났고, 밥을 먹고 약을 먹듯 씹고 삼켜서 읽었다. 며칠동안 물속에 가라앉기 싫어 버둥거리다 지친 감정들이 마침내 가라앉고 파동이 잔잔해진 듯한 마음이 된 채로 나는 오랜만에 편하게 잠들었다.



프롤로그 중에서

  상반되는 감정이 주기적으로 덮쳐온다는  때문에 
조울병을 바다에 빗대는 경우가 많다.

해변을 휩쓸어버리는 조증의 해일,
모든 것을 집어삼킬  달려드는 울증의 검은 파도,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조울병은 사막에  가깝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지글거리는 사막의 태양,
밤이면 영하로 내려가는 극단적 추위,
다양한 생명체의 활극이 펼쳐지는 바다와 달리,
사막의 극한 환경은 생명을 품을 만한 곳이  된다.

별자리 읽는 법을 익히지도 못한  
사막을 헤매는 것은 고립과 죽음을 의미한다. 
내가 그동안 조울병을 앓으며 써왔던 많은 일기와 메모들은
사막의 낮과 밤, 뜨겁거나 차가운 모래 위에 쓴 글들이었다.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면 광기의 절벽으로 떨어질까봐 무서워서,
나의 말을 영원히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펜을 들었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내용적으로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필력에 감탄했다. 지루한 내 글을 보면서 혐오에 찼던 순간들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잘 쓴 글은 질투를 불러일으키지만 좋은 글은 그럴 새도 주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좋은 글을 읽을 수 있어 감사한 마음만 든다. 20대 중반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24년째 재직 중인 그는 자신이 앓았던 조울병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환자인 자신뿐 아니라 환자의 주변인 목소리도 담았다. 주변 친구와 동료, 가족들의 사려깊은 기다림과 배려에 대해서도 말하는 부분에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조울의 사막을 '건넜다'라고 단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재발할 수 있는 병인만큼 완치보다는 관리에 가까운 이 병증 자체에 대해서, 아파본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실무적인 조언도 분명 조울병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41-42p.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아니 한때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일으킨다. 슬픔은 슬픔대로 받아들이고 실패는 실패대로 인정하고 힘들면 주저앉고 잘 안 풀리면 접는 것이 순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과오를 인정하기 싫었던 나는 에너지를 쥐어짜내며 만회하고자 했다. 술자리를 만들었고 술을 퍼부었다. 주어진 업무뿐 아니라 새로운 일을 부지런히 구상했다.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잇다른 이별의 혼란과 슬픔, 자책과 후회를 반전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무렵, 개나리꽃과 함께 노란색 조증도 찾아왔다.

‘달빛에 옥수수가 익는다’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지혜처럼 분별심을 가질 때까지 스스로에게 시간을 줬더라면, 다른 사람과의 만남과 술자리를 줄였더라면, 잠을 충분히 잤더라면 연애의 실패가 그토록 큰 감정의 소용돌이로 일파만파 번져가진 않았을지 모른다. 그때는 정직하게 슬퍼하는 법을 몰랐다.     




우정의 에너지, 209p.

그는 심드렁한 상태를 그냥 있는 대로 받아들였다. 채근하지 않았다. 적절한 침묵은 사려 깊은 기다림과 같다.     

(...)

일종의 천진한 마이너다움이라고 할까. 우울의 늪에서 헤매는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기보다는 가만히 곁을 지켜준 것도 주변부로서 겪은 경험 덕분 아닐까.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주변을 밝게 만들고 힘을 주는 사람도 좋지만, 우울한 사람은 그냥 우울한 대로 놔두는 여유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에너지 세기를 우열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도 천진한 마이너가 되고 싶다.               




218p.

초벌 원고를 읽은 조카는 이렇게 총평했다.

“병이라는 것이 일상을 무너뜨리고 이전의 모든 관계들을 복기하게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함. 특히 이모의 글을 전반적으로 읽고 아파서 생기는 문제들에 대한 책임을 내가 오롯이지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는 위안을 얻음. 감사합니다. 환자로 지내는 것이 나을까, 환자의 주변인으로 지내는 것이 나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음. 우리 엄마, 아빠도 내가 하는 말에 전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상처받는 것을 보면서 환자의 주변으로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자신 때문에 주변이 힘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감내해야 하는 것 또한 환자 몫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행복해지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라는 게 나의 최근 결론이었음. 환자든 환자의 주변이든 서로가 행복한 모습에서 다시 행복을 찾을 에너지를 얻는 것 같아서. 이건 보통의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환자로 지내는 것과 환자의 주변인으로 지내는 것 모두를 경험해본 고통을 지나온 이모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음.”     








매거진의 이전글 성능요? 그건 모르겠고 … 기분이 너무 좋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