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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월 Aug 09. 2020

맹물 마시는 여자

시원하고 톡 쏘는 사이다가 아닌, 미지근하고 맹숭맹숭한 맹물이 좋다






주변에서 시원하고 톡 쏘는 사이다를 좋아하길래 몇 번 따라 마셨다. 웬 탄산이 그렇게도 쎈 지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던 나는 탄산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밍밍한 설탕물이 된 사이다를 마셨다. 그러다 그것조차도 내 입에는 맞지 않다는 걸 느꼈고, 그때 내가 찾은 건 맹물이었다. 시원한 냉수도, 따뜻한 온수도 아닌 정말 미지근한 정수(淨水). 옆에서 물비린내가 난다며 라임이라도 넣어 먹으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저 그런 맹물이 좋았다. 왠지 지금의 나와 맞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맹물을 홀짝거리며 마시다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현실의 텁텁한 문제들이 맹물에 섞여 목 뒤로 넘어가는 것 같았다. 지금도 생각한다. 누군가는 좋아할 시원하고 톡 쏘는 사이다를 마신다고 나도 그 사람과 같은 느낌이 들까. 글쎄. 배에 가스만 차고 트림만 꺽꺽 나왔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보니 일정한 나이를 지날 때마다 ‘적당한 때와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순간이 왔다. 공부해야 할 때, 취업할 때, 결혼할 수 있을 때, 집을 사야 할 때와 같은 인생에서 ‘필요한’ 이야기들에 대해서.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이야기들에 누군가는 귀를 열고, 다른 누군가는 마음을 닫는다. 나는 귀를 여는 쪽이었다.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이다 보니 자연스레 열리기도 하고 열어놓아야만 할 때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유독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귀는 한껏 소리에 예민해져 있었다. 울렁거리는 속을 몸으로 느낄 때마다 속상한 마음도 함께 느껴졌다. 열이 오른 이마에 물수건을 댈 요량으로 냉장고를 열어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레가 들렸다. 켁-켁-켁. 목으로 넘어갔어야 할 물은 코로 나오고 기침하다 맺힌 눈물에 눈앞이 어른거렸다. 속에 잘못 고인 물을 게워내듯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물만 잘못 마셔도 체할 수 있다더니, 정말 그랬다.

       

나는 오늘도 사이다 대신 물비린내가 나는 맹물을 홀짝거린다. 시원하지도, 톡 쏘지도 않는 맹숭맹숭한 맹물을 가만히 마신다. 목젖까지 차오르는 한숨도 맹물과 함께 슬쩍 넘긴다. 지친 일상이든 지치지 않은 일상이든 이렇게나마 물 한잔에 숨을 돌린다. 숨을 쉰다. 여전히 매일 닥치는 문제들이, 귓가에 들리는 소리들이 잦아들지는 않는다. 잦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알 만큼의 시간이 또 흘러버렸다. 혼자 살게 하지 않는 세상이다 보니 시간은 참 많은 것을 알아버리게끔 한다. 지금도 앞으로도 맹물이 없으면 안 되는 세상에서 살 것이니 낯선 삶에 대한 적응은 끝나지 않는 평생의 숙제다.

      

나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이야기들을 내가 아닌 누군가가 정할 수 있지만, 말해줄 수 있지만, 그렇게 살아가게 할 수는 없다. 사는 건 결국 나다. 지금의 나에게는 ‘친구와 싸운 뒤 사과하고 화해를 할 수 있을 때’, ‘소중한 가족을 잃기 전 사랑을 해야 할 때’, ‘사회생활을 하며 한없이 눈치를 보더라도 정말로 말을 해야만 할 때’와 같은 이야기가 한 모금의 물 정도만큼은 우선한다. 앞서 살아가기 위해 들어왔던 '필요한' 이야기가 매우, 몹시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렇다. 여전히 어떤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지, 해결은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잘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럴 때면 맹물을 한 모금 두 모금 가만히 앉아 마셔본다. 이 맹숭맹숭하고 차갑지도 뜨겁지도 못한 맹물을. (이게 나답게 해주는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속이 뻥 뚫릴 사이다가 필요한 세상에서 나는 오늘도 맹물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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