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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월 Feb 18. 2024

해방의 문까지 같이 걸어가줄 든든한 친구같은 책

『해방의 밤』, 은유


해방의 문까지 같이 걸어가줄 든든한 친구같은 책

『해방의 밤』, 은유, 창비, 2024



<해방의 밤>, 은유


은유 작가가 읽은 책을 알려주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책이다.  ‘한 사람이 읽은 책을 알려주지만 독후감은 아니다’(20p)라 말했듯, 글에는 책을 통과한 작가의 이야기가 책 속 구절과 함께 인용 된 것이지 독후감의 성격은 아니다. 


이 책 표지 뒷면에 “책은 해방의 문을 여는 연장이다”라고 써 있는데 

막상 내가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드는 이 책의 이미지는 ‘해방의 문까지 가고 싶다하면 같이 걸어 가줄 든든한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아, 나 이렇게 계속 해방을 향해 가도 괜찮구나.’ 삶이 지치고 힘에 부쳐 머뭇거릴 때 

뒤에서 등 한번 슥 떠밀어 주는 친구말이다..!





사실 서평으로 책 몇 구절을 읽는 건 

유튜브로 한 편의 영화를 요약본으로 보는 것과 같다. 


책에 관심을 둔 사람 중 

일부만 서평을 읽지 않나 싶은 책의 특성상 

서평은 그마저도 도달하기 어렵다고 본다. 


요약본을 봤다고 해서 그 영화를 봤다고 할 수 없듯이 

누군가가 필터링해서 본 하이라이트만 적힌 서평이나

 책 줄거리 요약들도 그렇다. 


정말 재밌는 영화는 결국 본편까지 보게 되는 거던데. 

서평도 책으로 가기 전 중간다리의 역할이 되었으면 좋겠다.


『해방의 밤』에서 눈 담아 두었던 구절을 쓰면서 

이 책에 대한 애정을 담아보려 한다. 


실제로 눈담았던 구절이 적힌 책 목록을 보다가 

마음이 갔던 몇 권의 책을 사기도 했기에.


그런의미에서  ‘해방의 밤’도

이 서평을 다 읽고 났을 때 사고 싶어지는, 

사게 될 수밖에 없는 책으로 다가가지길 바란다.





프롤로그. 

‘내 삶은 책기둥에서 시작되었다’


19.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책기둥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생의 목격자 양천도서관이 일러준다. 너무 멀리 가지 말 것. 헛수고와 헛걸음으로 우연 앞에 나를 풀어둘 것. 어디를 가야 자기 존재가 피어나는지 몸은 안다. 10년 후 모습을 만들어가기보다 10년 전 모습에서 멀어지지만 않아도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무례하니까. 책은 사랑을 앗아가며 어디론가 사람을 치우치게 하니까. 벽만 바라봐서 벽을 약하게 만드니까. 벽에 창문을 뚫고 기어이 바깥을 넘보게 만드니까.” (문보영 ‘책기둥’ 中)


37.

내가 바라는 건 명절 철폐도 아버지와 밥 먹지 않기도 아닙니다. 집을 밥의 즐거움을 되찾는 장소로 만드는 것입니다. (...) 끊어내지 않고 연결하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싶습니다. 솔닛이 말한 작가의 책무인 “이야기를 깨뜨리는 사람이자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일을 계속해보고 싶습니다. 


38.


“낮은 곳들로부터 벗어날 때 사다리로 쓴 논리와 서사를 다른 이들에게도 건네주고 싶”다는 솔닛의 자상함이 내 막힌 글을 뚫어주고 이야기를 끌어내주었듯이, 내 이야기도 누군가의 말문을 틔우는 입김이 되기를 바라면서요. 



55.

『욕구들』에서 저자는 ‘딸의 목소리로 묻습니다. “어머니가 결코 갖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나 자신에게 허용할 수 있어?” ’하지 마‘의 세계에서 엄마를 구원하는 멋진 문장이죠. 


56.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에서 읽었는데, 울프는 사람에게 붙은 ‘라벨’을 해체하는 작업, 곧 누군가를 ‘이런 사람’ 혹은 ‘저런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데 수반되는 허위를 폭로하는 일에 작가 인생의 상당부분을 바쳤다고 해. 


66.

(알랭바디우 『사랑 예찬』)

Y에게 연애 개시 문자를 받고 제가 덕담을 건넸죠. 사람 깊게 사귀는 게 큰 공부니까 부디 잘해보라고요. 그 말은 이 사랑의 정의에서 왔어요. ‘사람 깊게 사귀는 일’이란 “유아론적인 ‘나’의 삶, 즉 ‘하나’의 삶을 포기”하고 “‘둘의 무대’가 가져오는 고통과 충돌, 불확실성 등을 감수하고, 그것과 지속적으로 대면하는 것”을 뜻하고요, ‘큰 공부’는 바이우가 말하는 ‘진리의 구축’이겠지요. 


67.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거대한 왜곡”이라는 말은 우리를 사랑의 대인배로 만들어줄 멋진 문장 같아요. 긴 연애 공백 끝에 찾아온 귀한 인연을 축복하고, 부디 사랑의 착상을 기원합니다. 



→ 인간관계를 맺을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마찰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언급하는데, ‘쉽게 돈을 벌고, 쉽게 사랑을 하는 것’이 한 인간에게 정말로 득이되지 않을 수 있음을 나또한 공감하면서 읽었던 지점들이 많았던 파트다.  





79.

“가진 것이 다르고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고 해서 계속 밀어내고 비난하기만 하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이어질 수 있어?”라는 채이의 대사나 “모두가 애써서 살고 있잖아. 너와 똑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삶이 전부 다잘못된거야?”라는 진경의 대사는 화살처럼 마음을 찌르더라.

내가 정한 속도와 방향으로 타인을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했던 과오가 떠올랐다. 여성들끼리의 연대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막상 나의 일상과 현실의 구체적인 관계에 놓인 여성을 만나는 일엔 미숙했던 것 같아.


80.

『붕대감기』 말미에 나오는 작가의 말을 고백처럼 네게 전할게. “마음을 끝까지 열어보이는 일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무참하고 누추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더 많지만, 실망 뒤에 더 단단해지는 신뢰를 지켜본 일도, 끝까지 헤아리려 애쓰는 마음을 받아본 일도 있는 나는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108.

세상이 만든 경쟁과 효율의 속도에 끌려다니노라면 내 조급함에 내가 파묻히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내가 친절해지는 삶의 안전장치를 스스로 구축하는 게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126.

(『분노와 애정』, 모이라 데이비)

“‘애들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잇을 것 같아. (...) 하지만 애는 내 삶을 망가뜨려.’(...) 두 번째 문장은 첫 번째 문장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우리가 양가성을 더욱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양가성을 받아들이는 능력, 그것이 바로 모성애가 아닐까.”



171. 


우린 슬픔에 무지한 종족입니다. 세월호 이전에도 슬픔은 허용되는 삶의 모드가 아니었죠. 슬퍼하는 사람은 약자로 분류되고, 약자는 구제의 대상이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권리의 주체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공적 발언의 장이 주어지지 않고, 슬픔은 각자 삭여야 할 사적 과제로 여겨집니다. 슬픔을 표현하는 말도, 슬픔에 공감하는 말도 공동체에 흐르지 못하니까 슬픔에 관한 언어가 빈곤하죠. 

(...)

176.

사회는 무슨 방식을 쓰든지 슬픔을 관리하려 한다, 사람들이 마음껏 슬퍼하도록 허용하면 대단히 위험할 수 있기에 일정한 처리방식을 따라가도록 한다고요. “사람들이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면 하나의 인식에 도달하는데, 그 대상은 결코 슬픔의 감상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삶의 조건들에 눈뜨기 쉽다는 것입니다.”



204.

한 사람이 외벽작업을 하는 반나절만이라도 땅 위에다 넓고 두툼한 매트리스 같은 안전장치를 깔아놓으면 제발 좋겠습니다. 주민들이 그를 운수 나쁘면 죽을 수도 있는 도구적 인간이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살아야 하는 존엄한 사람으로, 동료 시민으로 보도록 말입니다.



→ 살다보면 나와 살아온 배경이 다른, 다른 관계를 맺으며 살았던 인간들을 만나 그 차이를 실감한다. 그건 위화감으로 다가오기도, 새로운 배움의 경험으로 오기도 한다. 수용자의 태도와 해석의 문제인걸까.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는 요즘, 나를 보며 그 차이를 느끼는 상대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와 다른 타인을 대해야 좋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낯설고 불편하더라도 열린 마음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타자체험의 경험을 할 수 있음을 되짚어보며.



284.

불행의 스펙트럼은 넓습니다. 허기, 권태, 불안 같은 일시적 상태부터 가난, 불화, 폭력, 질병, 낙인 같은 구조적 고통까지. 우리가 이를 드러냈을 때 사람이 다가오기도 달아나기도 하죠. 그럼에도 저는 불행은 말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입니다. 내 불행을 나부터 숨기고 부정한다면 상황을 남에게 이해받기도 그리고 바꾸어내기도 어려워요. 또 불행을 털어놓아보아야 ‘불행을 말해도 되는 안전한 관계’로 자기 주변의 인간관계를 구축할 수 있겠죠.



약한 존재들이 기대어 사는 작품을 만드는 일본의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하다.” 찾아나서는 행위 자체가 나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동의합니다. 사는 동안 불행 상태가 해소되는 순간은 짧고, 지치고 불행한 채로 사는 시기가 더 길죠.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행의 해결사가 아니라 불행을 말해도 좋을 관계, 일단 밥이나 먹자고 할 사람이 아닐까요.


에필로그.

358.

삶에서 무엇을 왜 추구하고 어떻게 지키고 살아야 하는지, 차근히 하나씩 배워가는 중입니다. ‘주인공의 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사람의 온도’를 유지하는 게 행복이구나 깨닫습니다. 책과 친구의 도움 없이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가치에 대한 질문이 희박해지고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에 나와 놀아주는 유일한 두 존재가 바로 친구와 책입니다. 

(...)

제게도 '나를 살려둔' 책들의 목록이 있습니다. 불운을 대비할 수도 없고 스펙이 되지도 않는 책, 그깟 배부르지도 않은 책, 그러나 도통 무용해서 나를 억압하지 않는 책먼저 그것을 보았던 사람들의 깨침의 언어들이 담긴 책, 한 사람을 살려둔 책들의 목록과 이야기가 담긴 '독서의 보물지도'를 여러분 생의 윗목에 두고 갑니다. 나를 살린 책들이라면 남도 살릴 수 있으리라는 간곡한 마음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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