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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기 May 21. 2021

날씨가 어둑할 땐 우유가 들어간 커피가 좋다

'에콰도르 아시엔다 라 파파야 티피카 메호라도 워시드' 원두 이름이 참 길다. 여기서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건 에콰도르라는 나라 이름, 피티카라는 원두 품종, 워시드 프로세스 이 세 가지.


종종 들르던 카페인데 손님은 나를 포함해 두 명. 여기에 방문한 이래로 가장 사람이 적고 조용하다. 두 손님이 혼자 와서 커피 한 잔에 책만 읽고 있으니 음악 감상을 위한 레코드샵이 된다. 이 근방에 카페가 새로 생겨서인가 속으로 짐작한다. 사진 찍기에 좋은 공간 같아 보이던데, 사장님이 그 사실을 아는지 궁금하다. 적당히 멍 때리고 싶던 차에 좋은 기회지만 이 공간이 유지되길 바란다면 이보다는 더 많은 손님이 있어야 한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카페의 성황과 불황을 동시에 바란다.


커피가 조금 맹탕이다. 진하게 내려달라고 할걸 후회한다. 살짝 시고 단맛이 지배한다. 볕이 찌는 날에 마시면 좋았을 커피를 조금 어둑한 날 마신다. 이탈리아에서는 오전 11시가 지나면 카푸치노를 팔지 않는다는데 날이 꾸물할 땐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마시고 싶다. 비 오는 이탈리아는 여전히 에스프레소일까? 관례를 무시하고 언제나 카푸치노를 만들어주는 바리스타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책을 읽다가 커피를 마시려고 잔을 든다. 얼음이 가득한 유리잔 표면의 물 한 방울이 책 위로 떨어진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저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는다. 물은 마르고 자국은 남겠지만 내가 책을 읽던 어느 한 기억을 투명하게 기록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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