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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훈보 Feb 07. 2022

코끼리를 기록하는 법

추락하는 별에서 8화

폐장 후의 어린이 동물원.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아기코끼리가 아빠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빠 재미있는 이야기 해주세요."


코끼리는 무거운 덩치를 일으켜 차분하게 주위를 살핀 뒤 한 명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은 이름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좋아요."

"사람들은 우리를 코끼리라고 부르지?"

"네!"

"그런데 그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란다."




고려말 공양왕 3년(1391) 섬라곡국(태국)에서 사절단이 도착했다. 당시는 워낙 정국이 어수선한 데다 섬라곡국의 위치나 말을 아는 이도 없어 고려의 신하들은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2년 뒤 태조 2년 (1393)에 사절단이 다시 도착했을 때는 조금 달랐다. 이제 조선이 시작되었고 다양하고 흥미로운 화제로 사람들의 이목을 돌릴 필요가 있었기에 이즈음 조선의 신하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일부러 저잣거리에 드나드는 하인들에게 들려줘 도성에 퍼트리곤 했다. 그때 두 번째 사절단이 도착한 것이다. 흥밋거리가 필요한 시대이기도 했지만 이번 사절단이 더 눈을 끌었던 이유는 첫 사절단이 돌아갈 당시 짐꾼으로 붙여주었던 사내 하나가 함께 돌아와 이제는 사절단과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좋은 이야깃거리를 조선의 신하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밤만 되면 술상을 차려놓고 그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먼 곳에서 오느라 고생했네 듣자 하니 말주변도 좋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하여 오늘은 내가 자리를 마련했네."

"감사합니다. 제가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충모는 상 옆에 엎드려 고개를 들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지. 그 먼 곳까지 다녀왔는데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네 다들 안 그런가?

"맞습니다. 대감. 이놈아 오늘은 우리가 차리던 술상과는 수준이 다를 것이다. "


상 옆에 나란히 앉은 열명 남짓한 사람들이 호응해주었다.


"자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충모라 합니다."

"그래, 오늘 자리는 너를 위한 자리이니 실컷 먹고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거라. 아무 이야기나 거리낌 없이 해도 된다. 너에게 격식을 차리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니 긴장하지 말고 편히 해보아라."

"예."

"그럼 일어나서 저기 가운데로 앉지."


충모는 고개를 들어 양반들 사이에 넓게 비어있는 자신의 자리를 보았다.


"긴장하지 말고 이야기가 잘 들려야 하니까 가운데로 앉힌 것이야."

"예."

"먼저 한잔 받지."

"감사합니다."


술을 마시고 전을 집어먹은 충모가 운을 뗀다.


"그럼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볼까요. 집채만 한 동물 이야기가 어떨까 합니다."

"집채만 하다고?"


대감은 안주를 집다 말고 손을 멈추었다.


"예 아주 크고 희한하게 생긴 동물입니다. 저는 명나라에서 섬라곡국으로 가는 길에 서역 근처의 마을에서 그림으로 처음 보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현무나 기린과 같은 상상 속의 동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그런 큰 동물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어떻게 생겼나?"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요. 큰 초가집이 휘청이며 걸어간다고 하면 적당할지 모르겠습니다."

"초가집이 걸어 다녀?"

"예 꼬리도 있고 이렇게 입 옆으로 큰 송곳니도 있습니다."


충모는 양손 검지를  자신의 입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얼른 약과 하나를  넣고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귀 하나가 두 자는 족히 넘습니다. 게다가 이것이 아주 신기한 게 크기만 한 게 아니라 코가 엄청나게 깁니다."

"코가?"

"예."

"개처럼 비쭉 튀어나왔다는 이야기냐?"


충모는 얼른 술을 한잔 마신 뒤 전을 집어먹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 코가 사람이나 개의 그것과 같이 생긴 것이 아니라 나무덩굴을 닮아 있습니다. 아니 그것보다 구렁이 한 마리가 눈 사이에 달려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네요. 평소에는 주름진 구렁이가 입을 가리고 축 늘어져 있다가 뭔가 힘을 쓸 일이 있으면 그것이 현란하게 움직입니다.


충모는 팔을 꼬아 코끼리 모양을 만들어 휘저었다.


"그것이 그렇게 움직이는가?"

"예."

"허허. 정말 그런 동물이 있다고?"


술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물었다.


"털은 어떻고?"

"털은 거의 없습니다."

"그 큰 동물이 털이 없어?"

"예."

"그럼 가죽은 어디에 쓰지? 그렇게 커다라면 옷을 해 입어도 될 텐데."

"저도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가죽을 따로 보지는 못했고 하도 신기해서 다가가 한 번 만져보았는데 회색에 아주 딱딱했습니다."


그때 한쪽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옮겨 적던 말석 서생이 붓을 든 채로 말을 꺼냈다.


"저... 대감."

"그래. 무슨 일인가."

"말씀드리기 외람되오나 일전에 삼국사기를 본 일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야기해보게."

"소성왕 2년 5월 소같이 생긴 이상한 짐승이 현성천에서 오식양으로 향하여 갔다는 글이 쓰여 있는데 그 생김새가 어쩐지 저이가 이야기하는 것과 닮았습니다."

"책에는 뭐라 적혀 있었나?"

"몸은 길고 높으며 꼬리 길이가 석 자 가량이나 되고 털은 없고 코가 길다. 혹 그것이 아닐까요."


잠시 둘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고기를 집어먹던 충모는 서둘러 고기를 삼키며 말했다.


"듣고 보니 아주 비슷합니다."


"대감. 그럼 그림을 한번 그려볼까요?"


말석의 화공들이 나설 때가 되었는지 소리 내었다.


"그래 충모 네가 한 번 설명을 잘해보거라."


충모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공의 옆으로 가 섰다.


"발은 절구통 같고 다리는 큰 느티나무 같이 생겼습니다. 꼭 안으면 덩치 큰 사람 하나는 충분합니다. 길이는 이곳의 천장보다 높을 겁니다. 배는 잘 먹은 소처럼 불룩한데 몸통이 짧아 얼핏 보면 토실토실한 강아지 엉덩이 같이 생겼습니다."


충모는 주먹을 쥐고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


"다리를 제외하면 몸뚱이는 이런 느낌입니다."

"성격은 평소에는 온순한 편인데 얼굴은 이마가 툭 붉어져 튀어나와 있어 심술궂은 노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가운데 제 팔뚝보다 굵은 코가 아까 말씀드린 구렁이처럼 긴 코가 달려 있지요. 그 옆으로 큰 송곳니가 두 개 있고 그 위로 잠자리처럼 약간 옆으로 벌어진 눈이 크게 달려 있습니다. 귀는 나비의 날개 한쪽 같은데 훨씬 크고 눈은 사람처럼 눈썹이 있는 게 영 희한하게 생겼습니다."

"그런 동물이 있는가?"


네 명의 화공들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충모는 음식을 먹으며 고칠 곳들을 이야기해주었다.


"다 그렸사옵니다."


"그나저나 대감. 이름을 적어야 하는데 뭐라고 적는 게 좋을까요."




"그래서요 아빠? 뭐라고 적었어요?"


아기 코끼리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글쎄."


아기 코끼리는 너무 궁금했다


"코가 기니 <코긴이>라고 적었을까?"

"상상 속에 서나 볼 법한 코가 큰 동물이니 <코기린>이라고 적었을까?"

"나중에 월인석보에 적은 것처럼 <고키리>라고 적었을까?"


"아가야."

"네"


아기 코끼리는 눈을 반짝였다.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 다 같은것이라면 모두가 우리였다는 게 중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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