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우주

by 이응이응이응



사주, 그리고 팔자.


이 시대에 ‘팔자‘는 도저히 저항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숙명을 어쩔 수 없을 때 쓰이는 부정적인 말이라고 할 것이다.


인간의 팔자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졌고, 그래서 절대 도망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주명리학에서 유독 나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조화와 균형, 그리고 흐름이다.


나의 삶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미 다 정해져서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조화와 균형, 흐름이라는 말은 ‘팔자’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주명리학은 대운과 세운 같은 어떤 때를 만났느냐에 따라, 스스로 어떤 기운을 보태고 빼기 위해 노력하느냐에 따라 운이 달라진다고 말하고 있었다.

숙명은 정해져서 바꿀 수도 피할 수 없는 것이라지만 운명은 나의 선택과 노력으로 그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사주팔자는 숙명과 운명을 모두 담고 있다.


내가 파악한 사주명리학은 이렇게 정의될 수 있었다.


‘자유 의지 가득한 숙명이라는 역설’


나는 이 부분에서 꽤 충격을 받았다.


내가 생각하는 사주는 숙명 그 자체이고 인간은 그 숙명이라는 기계가 돌아가도록 하는 나사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사주는 오직 내가 있어서 존재하는 우주다.


‘나’를 지구라고 해보자.


우리가 사는 실제 우주는 지구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지구가 없어도 사라지지 않겠지만 나의 우주는 그렇지 않다.


내 ‘사주’라는 나의 우주는 내가 없으면 존재의 이유가 없다.

내가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주가 탄생했고 나를 중심으로 우주는 질서를 만들었다.

사주는 ’기운‘이 기준보다 많거나 적은 걸 판단해서 부족한 건 보태고 넘치는 건 덜어내는 방식으로 ‘중화’, 즉 균형이 잘 맞는 상태를 추구한다.


‘팔자’를 구성하는 ‘천간’과 ‘지지’ ‘음양’과 ’오행‘이 어떻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흘러가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건 ’기준‘인데, 그 기준이 바로 ‘나’라는 것이다.


내 사주팔자와 오행은 오직 내 우주의 ’기준‘인 나를 위해 돌고 흐르는 별이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사주란 미래를 예측하는 점술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이해하는 사주는 나라는 사람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우주다.


우리가 미래를 알고자 하는 이유는 결과가 아니라 희망과 가능성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돈을 더 잘 벌 수 있을까?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할 수 있을까?

내가 이 직업으로 사회적인 성공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것들은 나의 바람이기도 하지만 일말의 희망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더 가깝다.


내가 당장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닌 것도 알고, 찬란한 미래에 대한 분명한 약속을 얻고자 하는 욕심까지도 아니다.


그저 내 미래의 언제쯤에는 내가 원하는 미래를 얻게 될 가능성이 나의 ‘숙명’에 의미하게나마 새겨져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사주팔자라는 숙명은 아주 역설적이며 묘한 데가 있다.


나를 규정하지만, 동시에 나의 가능성을 일축하지 않는다.


재물을 얻기 좋은 방식이나 정해진 배우자 유형, 나의 취향과 기운 같은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선을 그으면서도 결국 자유의지에 따른 나의 선택으로 얼마든지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희망도 제시한다.


사주는 내 숙명을 알았으니 그냥 이번 인생은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나의 처지와 환경을 알고 가능성을 읽었으니 이제부터는 자유롭게 선택하며 인생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부추기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너무 궁금해졌다.


‘사주팔자’라는 내 우주 속의 나는, 진짜 어떤 존재일까?


이전 03화오행, 결핍의 보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