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갯빛 언덕을 만든 사람들
"문을 열었다 도망쳐 나왔어요." 심심치 않게 육일봉의 문을 넘지 못한 사람들에게 듣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인쇄소가 늘어선 골목 6층에 위치한 육일봉에 들어서면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혹은 압도됩니다. 그곳은 가정집 같고, 신당 같고, 전시장 같고, 파티룸 같습니다.
숨이 찰 듯 6층에 올라서면, 옛 음식점에 걸려 있었을 것 같은 대형 풍경액자에 '六一峰'이라는 흰 글씨가 선명합니다. 차오르는 숨, 넓은 경치를 보니 마치 산 정상에 오른 듯하기도, 80년대 영화 오프닝의 한 장면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진 위엔 주석이 달리듯 '소통과 평화의 플랫폼'이라 는 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후 마주한 현관엔 '극락문'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습니다. 문 밖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육일봉'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은 자신이 겪어온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드러냈음을 알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개인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동시대 사람들이 함께 겪는 어려움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육일봉의 신호를 받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함께함으로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같이 성장할 문이 열립니다. '신진'이 '초신진'을 위해, '소수자'가 '소수자'를 위한 길을 열어갑니다. 각자의 색으로 채워진 공간은 점유자들에게 극락이 됩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친구들에게 극락문을 열어준 육일봉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본 인터뷰는 작은도시이야기와 ACoop이 함께 진행하는 ‘자립건축'의 일환으로 진행된 내용을 기반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인터뷰이
곽은정 (춘리)
박가인 (가인)
목차
육일봉 이야기
기획 이야기
공간 이야기
내일 이야기
육일봉 이야기
가인 : ‘육일봉’은 전 대표가 있을 때 정해서 지금까지 사용 중이에요. 당시 주변에 ‘봉’으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공간이 없었어요. 전 대표는 ‘봉’으로 공간 이름이 끝나길 바란다며 제게 어떤 게 좋을지 물고 제 입에서 ‘육봉肉棒’이라는 말이 튀어나왔어요. 그것을 들은 전 대표는 너무 좋다며 바로 이름으로 정했어요.
‘육’과 ‘봉’ 사이에 –(하이픈)을 중간에 넣었어요. 한자로 쓰면 한일자 ’一’와 같은 형상이라 ‘육일봉六一峰’이 되었어요. 저희 공간이 601호이기도 하고, 남성의 음경과 여성의 유방 모두 육봉이라고 칭해서 모든 성에게도 평등한 명칭이어 사용하게 되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사익의 미학’ 같이 고급스러운 이름을 짓고 싶었지만 되돌릴 수 없었어요.
전 대표라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지금은 함께 하시지 않은 것 같아요. 멤버 구성에 대해 궁금해요.
가인 : 전 대표는 당시 대학 교수가 되어 보내줬어요. 너무 좋은 자리라 보내줄 수밖에 없었죠. 처음 만났을 당시에도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학교에서 만난 것은 아니고 외부 전시를 통해 만났어요. 약 5년 전 그분이 이곳으로 저를 불렀어요. 와보니 인테리어랑 공간이 너무 예쁜 거예요. 당시 작업실을 구하고 있던 터였는데 이곳이다 싶었어요. 엄마한테 전화해서 '750만 원' 있냐고 물으니 마침 있다고 하셔서 바로 엄마에게 돈을 빌렸어요.
춘리 : 3년 반 전에 ‘육일봉’에 찾아와서 박가인 작가에게 함께 일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전엔 ‘감각의 제국’에서 일을 하면서 을지로의 사람들을 알게 되었어요. 이후 ‘육일봉’도 알게 되었고요. 박가인 작가도 알고 있었고, 작업을 매우 좋아했었어요. 알게 된 지 1년 뒤 전 대표님이 좋은 곳으로 가게 되시어 운영을 못할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전부터 공연을 기획하고 싶었는데 이곳이라면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해볼 수 있겠다 싶었죠. 좋아하던 박가인 작가와 함께. 그렇게 코로나가 한창 창궐하던 2020년 7월부터 동업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 외 함께 운영했던 동업자가 있어요. 1년 좀 넘게 함께하다 지금은 ‘한국에이즈퇴치연맹(iSHAP)’에 취직을 했어요.
기획이야기
가인 : 제가 겪은 어려움에서 기인했어요. 계원예대, 2년제 대학을 나오니 미술계에 진출하는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어요. 아트페어 알바를 하려고 해도 4년제 이상을 뽑는다고 했어요. 아트페어에 참가할지언정 알바는 못하는구나 싶었죠.
운영하는 공간이 생기니 마음대로 전시를 기획할 수 있게 되었어요. 테라스에 있는 온실 같은 유리방에서 전시를 기획했었어요. 비전공자, 2년제 졸업자, 고졸, 서류를 싫어하는 작가들을 모아서 전시를 한다거나 비빔을 너무 좋아해서 개명하신 '유비빔 선생님 개인전'을 열기도 했어요. 또 다 같이 '유니온 아트페어'에 나가기도 했었고요. 공간을 기반으로 시작된 전시가 외부의 전시와 연결되고, 나중엔 '일민미술관', '울산시립미술관'에서도 연락이 와서 전시를 하게 되었어요.
'일민미술관'엔 육일봉의 오브제를 가져가서 육일봉을 만들었었고, '울산시립미술관'에서는 공동체가 주제였는데 육일봉 자체를 옮겨와 주시길 바랐어요. 저희가 가지고 있는 온갖 쓰레기들을 다 가져갔어요. 한 반은 버리고 온 것 같아요.
춘리 : 박가인 작가가 육일봉에 있던 집기를 가지고 가서 산 모양을 만들었어요. 저희 심벌인 산 봉우리 두 개를요. 저는 육일봉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어요. SNS에 보이는 것 같은 멋진 모습의 육일봉과 현실에서 고생하는 진짜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두 개를 만들었어요. 스크린 2개에 함께 상영되도록 했었죠.
작가가 공간이 되고, 공간이 작업이 되어 다른 전시장으로 확장되었네요.
인스타를 통해 보면 육일봉만의 스타일로 활동하시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어요. 신나는 모습으로 활발한 모습을 보게 되는데 마케팅 요소로 적극 활용하고 계신 걸까요?
춘리 : 인스타그램으로 우리가 영업하는 모습이 많이 노출되고, 말씀하신 데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우리가 되게 잘 살고 있는 줄 알아요. 현실은 진짜 짠하게 대출받아 가면서 운영하고 큐레이터에게 막말 들어도 다 맞춰가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인스타에서 멋져 보인다면 기왕 그렇다면 잘 사는 것처럼 보여주자 하면서 이미지를 만들어요.
방에 이상한 사진들이 많던데 그것들도 주워오신 걸까요?
춘리 : 그 사진, 박가인 작가 대표작입니다.
가인 : 앞 방에 남성 사진이요? 우리 아빠예요. 살아계셔요.
춘리 : 당시 동업자 중에 HIV 감염인인 미술작가가 있었어요. 노래는 지원사업을 받아서 만들게 되었어요. 성평등에 관한 지원 사업이었어요. 그 사업을 통해 HIV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고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지 롤모델로 보여주거나 콘텐츠를 만들고자 했어요. 동업자가 약간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렇게 퀴어 프렌들리 한 기획들을 하게 되었어요. 비 퀴어를 배척하는 행사를 만들기도 했었어요. 퀴어면 입장료가 1만 원, 비 퀴어인은 입장료가 10만 원이었어요.
가인 : “이성애자인 게 부끄러우시면 눈을 깜박여 주세요.” 같은 규칙도 만들었었어요.
춘리 : 역차별 행사가 반응이 엄청 좋았었어요. 이후 공연도 저희 공간에서 하고 싶어 하셨고, 연대하기 등의 행사도 진행했었어요.
가인 : 그 외에도 퀴어는 아니지만 도시 문제를 이야기하는 ‘야마가타 트위스터’도 오셔서 강연도 하시기도 했고, 예술가를 위한 코인 투자하기 같은 워크숍도 했었어요.
[깨어나 보니 HIV 혐오 세상이라고라?] YOUTUBE 재생목록
가인 : 좀 억울한 이야기예요. 학교에서는 기획서를 쓰거나, 공모사업에 지원하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해주려 했어요. 친구 4명이 ‘아트윌(에듀윌의 오마주)’라는 브랜드를 만들어서 저희 양력을 적고 사람을 모집했어요. 1인당 5만 원씩 참여비를 받는 것으로 하였고요. 하지만 서울문화재단에서 전화가 와서 결국 더 진행을 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30통이 넘는 민원 전화가 왔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지원서 쓰는 것을 돈을 받고 알려 줄 수 있냐며.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죠. 돈 받고 기획서를 써주기도 하고, 쓰는 법을 알려주는 강좌들이 있는데, 당시엔 그게 문제가 되었어요. 차라리 우리에게 직접 연락을 줬다면 좋았을 텐데요.
참여자들이 응당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해 보여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휘발되니. 무료로 진행하는 게 더 이상했으리라 생각해요. 4분이 진행하려 했던 워크숍의 내용을 떠나서 학교에서 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하겠다고 마음먹은 대목이 참 신기하고 좋아 보여요. 어떤 이들은 경쟁자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노하우를 꽁꽁 싸매고 지키고 싶어 하는데 육일봉은 나도 신진인데 더 어린 친구들이 덜 고생할 수 있는 법을 나누려 했다는 대목이 놀랍고, 이것들 더 진행되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지고 있고 여음을 남겼다는 생각이 들어요.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적으로 성 소수자, 도시 문제, 예술을 전공한 청년들이 첫 발을 내딛는 환경에 대한 이야기들을 살피는 기획을 하신 것 같아요. 사회에서 챙기지 않았던 부분을 여기 계신 분들이 챙기는 행동을 하셨고 그것이 성공하고 실패하고를 떠나 메시지를 던지는 입장이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어 보여요. 아마 ‘육일봉’ 덕분에 산 사람들이 있었으리라 생각하게 됩니다.
공간이야기
가인 : 이곳에 저희가 오기 전 할머니 한 분이 사셨던 집이에요.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매물이 나왔던 거였어요. 건물주가 다른 층은 모두 정리하고 하얗게 만들었는데 6층은 못 건드렸던 상황이었어요. 유품이 모두 그대로 있었어요. 저희는 할머니가 남긴 것들이 좋았어요. 공간이 가진 원형을 그대로 유지했고, 아래층에서 버리는 테이블 등 가구를 가져와 공간을 더 채웠어요.
가끔 할머니를 위해 조용필 노래를 틀어드리곤 해요. 그리고 믹스커피를 타서 다락방에 올려놓기도 하고요.
춘리 : 지금 걸려 있는 거실 등도 그대로예요. 공간의 모든 것들이 이뻤어요. 기존 공간이 너무 좋았을뿐더러 저희가 환경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최대한 기존에 것을 활용했어요. 공간을 바꾸는데 많은 힘이 들기 때문에 바꿀 생각조차 안 했어죠. 최근에 저희가 공간을 부동산에 내놓고, 사람들이 공간을 보러 오면서 어떻게 바꿀까 고민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어요.
큰 변화는 없더라도 작업실로 쓰다 보면 자연히 변한 부분들이 있을 것 같아요.
춘리 : 박가인 작가는 설치 미술을 주로 하거든요. 그래서 공간이 자신의 공간이다 싶으면 막 자신을 묻히는 것 같아요. 콘크리트벽에 반짝이 가루가 발려 있거나 했어요. 문화역 284에서 전시했을 땐 그 방을 전시했었죠.
가인 : 한 번은 ‘틀딱의 방’을 만들었었어요. 전에 광화문에 가면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라는 현수막이 붙어있을 때였어요. 그런 정치적인 전단지를 모아 와서 벽에 붙여놨었어요. ‘허경영을 지지하는 이유 10가지’, 아빠랑 정치 이야기하며 싸운 카톡창, 현수막, 무궁화 등을 가득 붙였어요. 그것을 본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더라고요.
가인 : 이런 인테리어를 가진 공간을 서울 다른 곳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해요. 그 외 을지로에 집중한 관점을 이야기해 보자면 강남, 사당, 망원동 같은 느낌이었다면 아마 자리를 잡지 않았을 것 같아요.
‘신도시’라는 곳이 을지로라는 지역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처음을 뚫어 놓았던 것 같아요. 그 이후엔 ‘감각의 제국’이 있었어요. 그렇게 을지로에 공간들이 생겨나고 예술가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현장에 제가 뛰어들고 싶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공간이 너무 예뻤어요. 그때 엄마에게 전화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춘리 : 되었다고 생각해요. 저희가 직접 교류를 하지 않더라도 DJ들은 여러 공간을 왔다 갔다 하니 그들을 통해 다른 공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그쪽 사장님도 궁금해서 오시기도 하고 저희가 가보기도 했어요. 그 과정에서 교류가 되었어요.
최근엔 PIE(서브컬처를 중심으로 다루는 전시공간)와 함께 기획을 하기도 했어요. 저희와 함께한 DJ들이 그곳에 가서 행사를 하고, PIE대표님이 파티기획도 해주셨어요. 오픈덱으로 디제잉하시는 분들이 자주 오세요. 디제잉 파티를 열고 싶다고 먼저 연락이 오시면 대관을 해드리기도 했어요.
가인 : 손님들 중엔 밖에서 보고 궁금해서 왔다가 입구에서 도망가는 경우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희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은 문을 들어서면서 자신이 겪었던 힘든 일을 이야기하면서 들어와요.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게 너무 힘들지만, 장사하는 입장에서 안 할 수 없는 일이었죠.
춘리 : 이곳에서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봤어요. 더 이상 미련이 없을 정도로요. 공간 운영만으로는 수익이 생기지 않았어요. 돈이 벌려도 운영비로 다 쓰였고 그마저도 부족할 땐 각자 다른 일을 하며 그것을 메꾸고 각자의 생활비를 벌었어요. 그 과정 속에서 해보고 싶은 것을 원 없이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삶이 변화하는 시점에 접어들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어요.
가인 : 이제 공간과 잘 이별하고 싶어요. 공간을 운영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겪었어요. 애정했던 곳이었고, 내 색으로 잔뜩 꾸몄던 곳이었어요. 앞으로 공간을 기반으로 기획하고 작업하는 것은 친구가 운영하는 공간에서 하려 해요.
내일이야기
춘리 : ‘육일봉’을 아껴주시고 기억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중 메타버스에 아카이빙 하고 싶다는 분들이 계셔요. 아마 지금의 공간이 다른 형태가 되어 다른 곳에서 계속되기도 할 것이고, 아껴주신 분들 기억 한편에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무지갯빛 언덕을 만든 사람들
우리는 앞서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앞서 정해진 더 좋은 것과 더 나쁜 것이 오늘과 다름을 알고 있지만 변화의 속도는 몇 걸음 뒤에 따라옵니다. 때문에 두 걸음 뒤의 세상에서 오늘 나의 색을 편하게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차가 있더라도 나의 색을 잃을 순 없습니다. 빚이 바래 간다는 것은 점점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육일봉은 그렇게 빚이 바래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각자의 색으로 피어날 자유와 서로 연대해 느슨한 부족을 만들 기회를 제공해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육일봉의 서사가 단락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있지만 이곳에 쌓인 이야기와 세계관이 이곳을 점유했던 모든 이들에게 남아 각자의 형태로 다시 피어나리라 생각합니다. 등비빌 언덕이 되어주셨던 시간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두 분 앞에 열려나갈 삶을 응원하겠습니다.
육일봉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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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인터뷰어
이재원
이현준
정용운
허성우
청두
인터뷰 참관
송원서
류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