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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에 그려진 선물

2016. 골목길의 그림들

by 청두

"재료비로 지출 가능한 예산이 86만 원이 있어요." 벽화를 그리자는 주무관님의 말을 시작으로 몇 달 후 골목 셔터엔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그림이 그려지기 전과 이후 동네는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골목의 외관, 관계에 어떤 변화를 만든 2016년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목차

2015년

2016년

2017년


20161119다붓다붓 (39).JPG 엎질러진 페인트의 미소, 2016 ⓒ다붓다붓 서성원





2015년


철공소의 외피



R302∞의 을지로 벽화길 제안


서울 중구청은 공실개선사업의 일환으로 2015년부터 을지로 4가에 위치한 세운 5 구역(산림동)에서 '을지로 디자인 예술 프로젝트'를 시행하였습니다. 본 사업은 예술가, 디자이너를 지역에 안정적으로 활동하게 하기 위하여 부동산 임대료의 일부를 구청에서 부담하는 사업이었습니다.


2015년 상반기 첫 공모를 시작해 2015년 하반기에 두 번째 공모가 진행됩니다. 당시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자들로 구성된 동아리 'R302∞'이 본 사업에 지원하게 됩니다. 본 팀은 사전 답사에서 작가들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공장과 공장 외벽에 그려진 그래피티의 흔적을 발견하였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낡은 거리의 풍경에 멋을 더하는 흔적을 보고 팀 내 회화 작가들과 함께 벽화를 그려보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당시 벽화는 공공예술 영역에서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방식으로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변화가 명확했으며 관광객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명확한 지표를 만들어준 벽화조성 사업은 이화동 벽화마을, 감천 문화마을 등 다양한 지역에서 경관개선을 통해 활력을 불어넣는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 사례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지원서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해당 내용은 심사위원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으며 사업 시행 이후 생길 결과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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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부터 발견된 골목의 그래피티, 2025 ⓒ작은도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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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서 중 일부, R302∞, 2015 ⓒR3028




2016년

구경거리가 된 생활




이화동 벽화마을 벽화가 지워졌다.


아뿔싸. 성공적인 벽화마을 조성지로 사랑받던 이화동 벽화마을이 예상치 못한 이슈로 언론에 소개되었습니다. 대표적인 벽화였던 해바라기와 잉어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공공의 예산이 투입되어 공공 영역에 그려진 공공예술은 공공의 재산이었습니다. 벽화를 훼손한 범인을 잡고 보니 이화동 주민이었습니다. 미디어와 sns를 통해 보인 많은 관광객의 행복한 모습만큼 반비례하여 주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습니다. 떠들썩했던 이 사건은 벽화사업이 야기한 어두운 면을 돌아볼 계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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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동 벽화마을의 해바라기(좌), 주민들에 의해 지워진 해바라기(우) ⓒ서울시


이화동벽화마을 주거지 외벽에 쓰인 글귀




소심한 붓질과 되치기




한 밤 중에 알록달록한 소심한 벽돌들


이화동에서 가장 사랑받는 벽화 중 하나였던 해바라기와 잉어가 사라졌습니다. 관광객의 소음과 관음에 지쳐 벽화를 지운 주민은 처벌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으로 떠들썩했습니다. 지역과 공공예술프로젝트, 주민과 예술가는 대척점에 위치한 사람들처럼 이야기 되기 시작했습니다. 누굴 위한 미관 개선 사업이었을까. 기꺼이 벽을 내어준 주민, 재능기부를 요구받은 예술가, 지역에 활력을 주고 싶었던 공공. 증명되지 않은 믿음으로 서로의 권한과 재능, 책임과 역할이 서로 다른 곳을 향한 결과의 충격파는 곳곳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R302∞' 역시 떠들썩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아마 그때즈음이었을 겁니다. 재학 중인 교육대학원에서는 '공동체 중심 미술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대한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이화동의 이슈 때문에 수업 내용에서 다뤄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당시 청소년 보호 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선배를 통해 현장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어떤 아쉬움이 있는지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역의 주민들이 때마다 낸 세금으로 작업실 임대비를 지원받는 입장에서 다른 지역에서 만들어진 갈등 구조를 이식해 오는 역할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태깅을 하고 멀리 가버릴 수도 없는 입장이었고, 선례가 만든 긍정적인 면을 더 키워나가고 부족한 면은 보완해 나가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정말 작은 실험을 해보기로 합니다.


이른 밤 시간. 공장의 모든 이가 퇴근한 이후 장정 셋이 아크릴 물감을 들고 골목으로 나왔습니다. 지나가는 리어카, 수레가 치고 지나가 까진 건물의 외벽을 일부 칠해보기로 하였습니다. 바닥과 가장 가까운 벽에 최대한 형형색색 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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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을 칠하는 남자들, 2016 ⓒR3028



다음날 새벽 촉촉하게 이슬비가 내렸습니다. 이른 봄에 내린 비는 골목을 차분하게 만들었습니다. 멤버 중 한 작가는 조용히 골목 한편에 서 있어 보았습니다. 주변 반응이 어떤지 궁금했습니다. 놀랍게도 길을 지나는 누구 하나 벽돌에 색이 칠해진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무관심을 견디다 못해 앞집 사장님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벽돌이 원래 이런 색이었어요?"

"모르겠는데? 아니었나?"


모르겠다니. 우린 같은 가시광선을 보고 있지만 새 옷을 입은 벽돌은 공장의 사장님들의 눈엔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할지 생각하던 중 식당 이모가 머리 위에 쟁반을 얹은 채로 배달을 가며 이야기하였습니다.


"아유 곱다. 골목이 이렇게 이뻐진 것 처음 보네."


그 이모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렸다 물었습니다.


"이모, 이거 원래 이랬어요? 왜 달라 보이지?"

"아니, 원래 안이랬지. 누가 칠한 것 같아. 너무 이쁘다."

"이모. 그러면 이런 거 더 많아지면 어떨 거 같아요? 골목이 너무 산만하지 않을까?"

"뭐가 산만해. 이쁘겠구먼. 왜 삼촌 친구가 했어? 더 하라고 해. 더 하라고. 아주 많이 많이 해버리라고 해. 그거 보면 나도 기분 좋겠어."



소심한 색벽돌, 2016 ⓒR3028




칠 위에 답신처럼 붙은 RATBAT, 2016 ⓒR3028




아이들의 그림 같은 선물



86만 원의 재료비와 아이들


지금은 과장이 된 중구청의 담당 주무관이 R302∞에 찾아왔습니다. 지원서에 있었던 벽화 사업을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계획은 좀 세워보겠다고 하였고 얼마 후 후임자와 함께 만나게 되었습니다. 작가들이 혹 예산이 있을지를 물으니 86만 원이 있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마저도 소모품을 사는 비용이기에 페인트 업체에 직접 결재해야 하는 비용이었습니다. 고민을 하다 작가가 물었습니다.


"주임님, 저희가 공간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공간 지원을 받는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재능기부를 하게 되면 저희가 퇴실한 이후 입주하는 작가들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요. 더욱이 시장경제과(당시 담당부서)에서 진행되는 사업이 그렇게 진행된다면 모순적 이어 보여요. 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해 작가들이 계속 재능기부를 하면서 수익을 벌 시간을 써야 한다면요."


"그 말이 일리 있네요. 동의해요. 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생각해 봐야겠어요. 저희는 올해 예산을 이만큼을 쓸 수 있어서. 저희도 상부에 보고도 해야 하고 의회에도 사업 진행과 성과를 공유해야 해요. 그렇게 해야 전체 사업이 지속이 가능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어요."


"그럼,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저희는 교육 봉사를 할게요. 선배 중에 청소년 보호센터에서 친구들과 봉사활동을 하는 분이 있어요. 그 센터의 아이들 야외 활동과 협업이 항상 아쉬운 부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선배의 팀과 센터와 함께 아이들이 와서 같이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해봐요. 저희가 교육 목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면 다른 맥락에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셔터아트 진행 과정, 2016 ⓒ다붓다붓



이후 선배의 도움으로 봉사 단체 '다붓다붓'과 함께 교육계획을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사전에 예시 시안을 여러 개 만들어 셔터의 주인인 공장 사장님들과 논의 후 확정하였고, 예정된 날 아이들이 오기 전 셔터 밑색과 스케치를 그려놓았습니다. 곧 아이들이 도착했고 50여 명의 사람들이 북적이며 셔터에 그림을 그려 나갔습니다. 평소 센터 내에서 갈등이 있던 아이들은 아이들 데로, 친분이 있는 친분이 있는 데로 같이 그림을 그려 나갔습니다.


더 좋은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해 주었던 담당 주무관은 양손 가득 사비로 산 햄버거를 들고 골목에 와주었습니다. 식성 좋은 아이들이 선생과 주무관의 햄버거까지 먹어버려 다소 서운하고 민망한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공동체중심미술교육:산림동아트셔터골목, 2016 ⓒR3028



7개의 셔터에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태양공업사'에는 태양과 우주를 그렸고, 90세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는 공장엔 큰 발을 그렸습니다. 공간 내 해먹을 설치해 여유롭게 낮잠을 즐기는 사장님의 셔터엔 산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같이 그림을 모든 이들의 손도장을 찍었습니다. 언제 아이들이 다시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그때 셔터에 다시 손을 포개보는 모습을 상상해 보며.


다음 날 '태양 공업사' 사장님께서 붉은 눈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문을 쾅쾅쾅 두드리셨습니다. 철문이라 작은 충격에도 큰 소리가 나는 문이었지만 괜히 긴장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전에 없던 일이 벌어진 터라 예상치 못한 무슨 문제가 있어서 찾아오신 것일까 걱정하던 차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튀어나왔습니다.


"미안하다. 몰랐다."

"네? 뭘 몰랐다는 말씀이세요?"

"이렇게 그림 그릴 줄 몰랐다고."

"아니, 사장님 지난 2주간 그렇게 가서 어떤 그림 그릴지 보여드리고 같이 정하고 했잖아요. 왜 모르셨어요."

"사실은 재개발한다고 한 이후로 거래처가 다 끊어졌어. 그래서 내가 일이 없어. 나와서 계속 술만 마시고 있었어. 그래서 와서 하는 얘기가 도대체 무슨 소린지, 뭘 하겠다는 건지 잘 못 알아 들었어. 셔터에다가 뭐 한다고 해서 하라고 하긴 했는데 후회도 되고 해서 맘에 안 들면 다 지워버리려고 검은색 락카도 사놨었어. 전에도 누가 싸인해놓고 가서 내가 검정 락카로 지워버렸었거든.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지."

"그래서 셔터가 깨맸구나. 어때요. 이번엔 그렇게 지우지 않아도 될만하죠?"

"응. 그래서 미안해. 아이들이 오는 줄 알았으면 간식이라도 사놨을 텐데. 저 쪽 주물집 사장이 사진 보여주더라. 애들이 그림 그리는 사진. 애들한테도 너무 미안해. 너무 고맙고."

"에이, 사장님 그래도 울지 마요. 왜 울고 그러세요. 너무 좋아서 그러세요?"

"응. 너무 고마워 애들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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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공업사 셔터아트 전(좌) 태양공업사 셔터아트 후(우), 2016 ⓒR3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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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아이들과 그린 셔터아트 중, 2016 ⓒR3028



센터 팀장님의 우려와 달리 아이들은 그림 그리던 중 아무도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휴식이 필요한 적절한 타이밍에 예진이와 삼순이가 나타나서 아이들과 놀아주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놀아 준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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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과한 사랑을 받는 예진이(좌), 사업 진행 중 옆을 지켜주는 삼순이(우)



휴일 간 아이들이 셔터에 그려 놓고 간 선물은 동네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몇몇 공장의 사장님들은 작가들에게 찾아와 자신들에게도 그림을 그려달라며 견적을 요청하였습니다. 실견적을 받은 이후 매우 당황스러워하시기에 혹시 모르니 '02-120'에 민원을 넣어보라는 조언을 하였다고 합니다.


"중구청에서 셔터에 그림을 그렸는데 너무 좋다. 더 하면 좋겠다."라고



2017년



보건소와 공공예술


아이들이 떠난 이후로 담당 주무관은 어떻게 이 불씨를 이어갈지를 고민하였나 봅니다. 결국 관내 다른 기관과 협력하여 지속 가능한 예산을 마련해 다시 작가들을 찾아 주었습니다. 1년 전과 달라진 것이 있었다면 이번엔 작가들의 아티스트피를 포함한 예산이 편성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선물로 공장 사장님들은 기꺼이 자신의 셔터를 내어줄 준비를 하게 되었고, 작가들은 정당한 아티스피를 받고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바통이 작가 이원경에게 넘겨졌습니다. 이원경작가는 셔터아트프로젝트의 기획자가 되어 사업을 설계하고 운영해 나갔습니다. 많은 작가들과 함께 골목을 공공의 공간으로 칠해 나갔습니다.



셔터아트 진행 과정 중 성문유리 사장님의 도움을 받고 있는 이원경 기획자, 2017 ⓒR3028 류지영






PS.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그렸던 '태양공업사' 셔터엔 이제 Remiz작가의 새로운 작품이 그려졌습니다. 시의 적절합니다. 그렇게 고마웠던 우리 '언제나'-'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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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아트프로젝트, VR 캡처, 2025








참고자료


언론

이화동 '해바라기·잉어' 벽화 훼손 주민 경찰 입건, TBS, 민세희, 2016.05.13

[홍경한의 시시 일각]빛바랜'벽화마을', metro, 김현정, 2024.06.26

이화마을 벽화는 왜 지워졌을까, 내 손안에 서울, 이선미, 2021.01.29


VR

셔터아트프로젝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산림동 60-1


지원서

R302∞ 을지로디자인예술프로젝트 활동계획서, R302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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