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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서

서로의 색이 스며드는 서녘

by 청두

우리는 어떤 질문으로 삶을 채워가고 있을까요. 한때 질문은 효율을 떨어뜨린다며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된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양질의 질문을 할 수 있는 이가 무궁무진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런 때 마음껏 질문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시의 적절해 보입니다.


어느 날, 동네 친구들 사이에서 '질문'을 키워드로 이야기하는 이를 만났습니다. 답이 없는 것들 옆에 질문을 내려놓고 어딘가 있을 답의 실마리를 찾는 이는, 다른 이들에게도 그 시간과 여유로 대했습니다. 그 시간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질문은 애정이 있는 것, 고통이 있는 곳으로 다가갈 용기를 주는 길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에서부터 시작된 질문은 메아리가 되어 타인을 통과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질문에는 타인의 삶과 숨이 묻어 있습니다. 그 과정의 귀함을 알고, 나누어가는 '질문하는 집'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가 가진 색에 잔잔히 스며들며 물들어 갑니다. 마치 노을이 물드는 저녁 하늘처럼.


마음껏 묻고, 고민하고, 방황할 수 있는 울타리가 되어주는 「작업실 서녘 : 질문하는 집」의 주인 '지은서'를 소개합니다.



목차

지은서 이야기

작업 이야기

기획 이야기

공간 이야기

친구 이야기

내일 이야기



_MG_3444_main.png 서녘의 문, 2025 ⓒ작은도시이야기




지은서 이야기




안녕하세요. 독자분들께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은서입니다. ‘작업실 서녘’이라는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어요.


작가님의 서사가 궁금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어요. 컴퓨터과로 들어갔어요. 공학으로 진로를 선택했던 거예요. 재밌었어요. 이론 관련된 공부는 너무 즐거웠어요. 그런데 실습에서 남자친구들을 이기기가 힘들었어요.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문득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어릴 적 패션디자인과 미용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쪽을 다시 시작해 볼까? 생각하다가 복수 전공으로 시각다지인을 선택하게 되었어요. 열심히 재밌게 했어요. 그룹을 만들어서 프로젝트도 하면서. 그렇게 졸업을 했는데, 여전히 뭔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졸업 이후 나는 뭘 하면서 사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 보다 타인의 이야기 듣는 것이 좋고, 어렵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심리 상담을 해봐야겠다 싶었죠. 막상 심리학으로 학교를 가려니 학부 때 학점이 필요해서 학점 은행제를 했어요. 그러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완전히 빠져들었어요.


컴퓨터 → 시각디자인 → 심리치료를 지나 드디어 미술을 만나게 되셨군요!


그동안은 제가 받아온 많은 스트레스를 표현할 수 있는 창구가 하나도 없었어요. 계속 떠오르는 형상과 색채가 있었어 화실을 찾아갔고, 그림을 그리기가 시작됐어요.


스물 다섯 이전에는 꾸준히 하는 것이 없었거든요. 거의 3년 주기로 변덕스럽게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바뀌었었어요. 지금은 3년이 지났는데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저를 보니 신기해요. 그렇게 진로를 바꿔 회화과를 갔어요.


심리학에 대한 아쉬움은 없으세요?


심리학은 뭔가 나중에도 기회가 있을 것 같아요. 당장은 그림이 너무 궁금했어요.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치유를 하는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것이 궁금했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작가님께서 스스로가 좋아진다는 경험을 하신 거네요?


네 맞아요. 그림 그리면서 치유되었던 경험을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왜냐면 나만 알기엔 너무 귀한 것이라 느꼈기 때문이었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어떤 색을 쓸 때 편안함을 느끼는지, 혹은 불편함은 느끼는지를 알게 되기도 했어요. 또 물감이 말라가는 과정을 기다리면서 ‘잘 기다리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고요. 그렇게 스스로와 대화하면서 저를 알아가는 시간을 보냈다는 게 중요한 지점인 것 같아요. 그것이 저를 치유시켰다고 믿고요.


저는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치유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느끼고 시작을 했지만, 학교에서의 미술은 제 생각과는 다른 면이 많긴 했죠.(웃음)


학교를 합격하고 화실 선생님께서 수업을 같이 해보면 어떻냐는 제안을 해주셨어요. 이후 수업이 제게 중요한 일이 되었어요. 적성에도 잘 맞았고요. 하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수업을 하는 게 쉽지 않아서, 학교를 미뤘어요.(웃음)


작가님께서 지나오신 서사가 매우 흥미로워요. 다양한 영역을 지나 오늘로 오게 되었는데, 많은 고민과 불안이 매 순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럼에도 대면하고 있으면 안정감이 느껴져요. 방황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삶 전반적으로 방황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안정감이 있는 건 양가적인 것이 함께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인 것 같아요.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되는 것들이 있어요. 「소란한 침묵」, 「거센 침묵」과 같은 작업들이 있어요. 서로 양가적인 것이 함께 존재하고 있어요. 어렵고 혼란스러운 고민들이 있다가도 결국 결론은 하나로 귀결 되더라고요.


작가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방황을 즐길 줄 아는 사람, 서퍼가 파도를 타듯 방황을 탈 줄 아는 사람 같이 느껴집니다. 때마다 나에게 필요한 방황들을 받아들일 여유가 있고, 소란함 끝에 고요를 찾는 과정을 알고 있기에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안정감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지은서 작가의 오른손의 점과 j 타투, 2025 ⓒ작은도시이야기





공학도에서 디자인, 회화, 예술교육으로 다양한 영역을 경험하면서 오늘에 오게 되셨는데, 정체성에 대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 같아요. 예술이라는 영역 안에서 이루고 싶은 성취가 있으실까요? 어떤 사람이고 싶은 바람이 있으실까요?


제가 저를 정의하려고 하지 않는 타입인 것 같아요. 그래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것 같고요.


작업하면서 느낄 수 있는 성취, 교육을 하면서 느낄 수 있는 성취가 뭐가 더 높거나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하나 같이 느껴져요. 작업실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즐거워요. 저 스스로와 문답을 주고받으며 작업을 하는 것도 그렇고요.

지은서 자가의 노트들 ⓒ지은서

작업을 하다가 스트레스받아서 눈물 날 때 때도 있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제 경험이 되잖아요. 그렇게 쌓이는 경험들을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 과정을 결국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작업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음, ‘예술을 하는 사람’ 같이 느껴져요.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는 것도, 내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작업을 하는 것도, 메모를 남기는 것도, 하루를 정리하며 글을 쓰는 것도. 그렇게 자신의 형식과 언어로 예술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들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예술인 것 같아요.


예술이라는 영역 안에서 어떤 것을 이루고 싶은 성취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으실까요?


사람들을 연결시키고 소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제가 하고 싶은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정의하는 예술에 동의하는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요. 그 사람들과 서로 응원하고 지지하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가 예술이라는 영역 안에서 이루고 싶은 성취예요.


‘인정받는 예술가가 되겠어!’가 아닌, 자연스러운 나의 고민과 활동들이 쌓여 ‘서녘의 예술’을 만들 것 같아요. 좀 거창하게 느껴질 수 있는 비유이지만, 연구 발표 이후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데 까지 약 40년 정도 걸린다고 해요. 연구로 미지의 영역을 밝히고, 사회에 적용되어 변화를 일으키고, 그 변화를 인정받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까지 소요되는 시간이라고 해요. 이 처럼 새로운 것이 열리는 시점과 적용되어 변하는 과정엔 시차가 수반되는 거죠. 오늘 쌓아가는 시간이 후에 일정 시차를 두고 어떤 영역을 만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지은서의 노트, 2025 ⓒ작은도시이야기








서녘 이야기



작업실 ‘서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소개를 부탁드려요.


'서녘'은 제 이름에서 따왔어요. 뭔가 내 것이다라고 느껴져야 맞는 것 같은데, 그게 제 이름 안에서 나와야 제일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했어요. 서녘으로 해가 지잖아요.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기도 하고, 따뜻한 노을이 있기도 하고요. 그리고 제 이름은 '연못 지池', '은혜 은恩', '서녘 서西'를 써요. 그래서 ‘서녘’이 되었어요. 대단한 의미는 없어요.


작업실이 작가님이네요!



스크린샷 2025-10-31 002832.png 서녘의 질문들, ⓒ작업실 서녘:질문하는 집 블로그



네, 그런 것 같아요. 이곳은 자연스럽게 널브러진 채로 있어도 괜찮은 작업실을 만들고 싶었어요. 이후 ‘질문하는 집’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어요. ‘질문’은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키워드 중 하나예요.


‘질문하는 집’이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어서 일까요. 여기 오시는 분들이 보통 심리 상담하러 오시는 것 같다고 말씀해 주세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왜일까를 생각해 보면 한쪽에서 질문을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생각해서 입으로 뱉어야 하잖아요. 그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림을 그리면서 치유가 되었어요. 어떻게 그 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그림을 그리는 행위도 중요했지만, 저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질문을 했냐면, 그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었어요.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를 그땐 전혀 몰랐어요.


은서라는 사람이 그림을 그려가는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스스로 질문을 했고, 그것을 경험하면서 회복된 과정의 시간이 공간의 형식으로 변형되어 오늘의 작업실이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이름도 같고 정체성도 같고. 사람들이 이 공간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은서라는 사람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자기 몸에 베이게 하는 과정을 경험하며 그들도 회복되도록 돕는 것 같아요. 마치 바다에서 민물로 올라온 물고기가 전혀 다른 환경에 노출되면서 몸에 배었던 염분을 덜어내는 것처럼.


더불어, 작가님의 말씀을 들으니 참 적절하게 지어진 이름 같아요. 질문을 한다라는 것은 말씀해 주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얘기하는 공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안정감을 주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사람들은 어떤 틀 안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변수로부터 보호받는 틀 안에 있음으로써 예상 가능하고 보호받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공간이 ‘질문하는 집’이라는 장소가 되어준다는 것은 내가 너의 사고의 자유와 발언의 자유를 안정적으로 보호해 주는 울타리를 만들어주는 ‘말’ 같아요. 심지어 ‘그림’이라는 매체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메워주는 것 같고요. 그림을 보며 나를 이해하게 되고, 서로에게 질문을 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는 곳. 그런 의미에서 「질문하는 집」은 참 잘 지어진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서녘의 화훈, 2025 ⓒ작은도시이야기


《작업실 서녘 화훈》

1. 사랑이 담긴 마음으로

2. 한 겹 한 겹 차분히

3. 불확실하지만, 그럼에도 시도한다

4. 단순한 생각

5. 풍부한 행동

6. 우리는 스스로를 조각해 나간다







작업 이야기



스스로를 연구하는 사람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작업을 하시면서도 스스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실 것 같아요.


많은 종류의 작업의 접근 방식이 있잖아요.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작업을 한다던지,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타파하기 위한 작업을 한다든지. 저는 저만 생각하며 작업해요. 어쩌면 어려움이 많은 세상에서 저만을 생각하며 작업을 한다는 것이 스스로 이기적으로 느껴지기도 해요. 하지만 그게 아니면 작업이 안되더라고요.


‘나’를 찾고 싶은 것일까, 아마 그보다는 작업을 하면서 ‘나’를 그리고 싶은 것 같아요. 그래서 뭔가를 그린다기 보다 그저 움직이는 거예요. 나를 찾는 것과는 다른 느낌인 것 같아요. 나를 그리는 게 무척이나 어려워서 고민하다 보니 스스로를 조금씩 알게 되고, 그렇게 나를 찾아가는데 작업이 도움을 주는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며 나를 알아가다 보니, ‘나는 타인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어요.


타인을 귀하게 여기시고, 스스로에 대해서 너무 알고 싶고. 양면적 이어 보이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붙어 있는 것 같아요.


그 말이 저를 설명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모든 것을 다 보고 싶어요. 이중적인 것, 양가적인 것, 양면성, 다양성 이런 것들을 항상 머리에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제 작업의 경우 「거센 침묵」, 「소란한 침묵」처럼 한 가지 색 같아 보이는 것 안에 다양한 모습이 공존할 수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상상하면서 작업을 해요.


수행자처럼 느껴지는 대목이에요.


그림을 그리면서 많이 생각했어요. 그 전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거든요.



지은서, 거센 침묵, 112.1×162cm, Hanji, mixed media on Canvas, 2024 ⓒ지은서







기획 이야기



서녘 블로그를 보니 작가 인터뷰와 오픈스튜디오를 진행하셨더라고요. 작가 한 명 한 명을 조명하는 기획 같았어요. 사실 매우 손이 많이 가는 일이잖아요.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거예요?


작업실을 같이 사용하시는 분들 중 오픈스튜디오를 하실 분을 정하고, 그 기간에 맞춰 인터뷰를 병행하고 있어요. 작품을 다 꺼내놓는 김에 한번 정리하고 가기 위해 인터뷰를 남겨놓는다고 봐주시면 돼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날려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것은 전에 일했던 화실에서 있으면서부터 기획해 시작한 일이었어요. 제가 해보고 싶다고 하니 선생님께서 믿어주고 맡겨 주셨어요. 인터뷰이에게도 좋았고, 수업을 하면서 옆에서 보아온 제게도 좋았고, 반응도 좋았어요.


인터뷰이가 작업을 통해 어떤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스스로 생각한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가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지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인터뷰를 함으로 그것이 정리되고 기억될 수 있는 여지가 생겼어요. 작업 과정은 어떠하였는지 알고 있으니 그 과정에 제게 소중하게 느껴졌어요. 다른 사람들도 그 과정을 안다면 너무 좋을 것 같은 마음에 용기를 냈어요.


전시를 보러 가면 아카이빙 된 자료가 많을수록 느낄 수 있는 것이 많아지더라고요. 후에 누군가 제가 진행한 인터뷰를 읽으며, 인터뷰이에 대해 더 잘 수 있는 자료로 쓰였으면 좋겠어요.


사람을 귀하게 봐주시는 눈을 가지고 계시네요. 그 눈이 작가님께도 많은 힘이 되어주는 것 같고요.


‘나’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껍데기만 존재하고, 살아가면서 타인이 계속 나를 스치는 거예요. 내가 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모두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내가 뭔가를 좋아한다고 해도, 기준이 되어주는 타인이 있어야 명확히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알 수 있게 돼요. 혼자 살면 아무것도 될 수 없는 거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모두가 귀하게 느껴졌어요.



오픈스튜디오 작가 인터뷰, 2025 ⓒ작업실 서녘:질문하는 집 블로그





그간 해오신 것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작가님께 큰 영향을 준 것이 있을까요?


제가 혼자 기획한 것은 아니지만 여운을 많이 남긴 기획이 있어요. 당시 제가 일하던 곳이 성인취미미술 화실이었어요. 많은 수업을 맡게 되었고, 그중 전시반도 있었어요. 6회 차 분들부터 제가 담당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일정이 밀리면서 앞 회차 분들(5회 차)과 함께 전시를 진행하게 되었어요. 참여 인원은 24분 정도 되었던 것 같아요. 평소 전시보다 많은 분들을 관리하게 되었죠.


인원이 많은 만큼, 그 안에서 많은 용기를 볼 수 있었어요. 전시라는 형식으로 한걸음 내디딘 참여자들이 느끼는 뿌듯함이 있었어요. 삼삼오오 모여서 반짝이는 눈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눈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우연히 제게 떨어진 일이었지만, 하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과정을 보면서 참 보람되었어요.


타인의 행복이 나의 성취가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제 작업으로 어떤 공감을 받았을 때 보다 더 많은 보람을 느낄 수 있었고, 사람들이 용기를 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꺼내 놓고 소통하고 성취하는 과정을 보면서 제가 어떤 것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조금 명확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후에도 해보고 싶은 기획이 있으실까요?


메모를 보면 막 써놓은 것들이 많이 있어요. ‘사람들을 모아서 연결해 보일 수 있는, 용기 낸 사람들과 그것을 보고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함께 있는 공간, 그것이 사랑’이라고 적어놓았던 적이 있어요. 최근에 ‘을지아트트레일 EAT(이하 EAT)’이라는 일이 을지로 일대에서 벌어지는 기획에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EAT은 불특정 다수의 을지로의 예술 공간, 예술가 작업실을 서로 연결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이에요. 아직은 초기 단계라 어떤 일을 어떻게 잘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너무 하고 싶었던 일이라 재밌을 것 같아요. 개별로 존재한 이들을 이어 ‘사랑’을 만들 수 있는 일이 지역을 거점으로 벌어지게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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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서 작가의 메모 ⓒ작은도시이야기







공간 이야기




작업실과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싶어요.


작업실에 있으니 참 좋습니다. 익숙지 않은 공간이 좋게 느껴지는 이유는 자연스러운 편안함 때문인 것 같아요.


저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고 싶었거든요. 절대 안 되는 사람이더라고요. 이제 받아들였어요. 펼쳐놓아 짐에 나름의 질서가 있으니.


제가 기억을 잘 못해서 이렇게 다 펼쳐놓고 사는 것 같기도 해요. 다 숨겨놓고 어디 정리해 놓으면 그냥 잊어버리거든요.


특별할거나 대단할 것 없는 사람이 작업실을 만들면서 도움을 되게 많이 받았어요. “선물해 준 것, 받은 것 다 이름 써놔야겠다.”라고 했을 정도로 마음을 보태주셨어요. 그 도움이 쌓여서 공간이 만들어졌어요. 타인이 이룬 나의 공간, 그러니까 내가 나누는 곳이 아닌 모두가 나눠준 공간인 거죠.


욕심이 없는 사람 같지만, 욕심이 되게 많은 사람이셨네요! 사람 욕심이 있는 게 정말 중요한 욕심인 것 같아요. 그리고 받은 은혜는 반드시 잊지 않겠다는 의지.



작업실 문에도 많은 것들이 붙어 있는 것들은 어떤 것들인가요?


제가 너무 잘 잊는 사람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요. 누군가 제게 써준 마음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 나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것 같아요. 그 소중한 마음들을 제가 잘 잊는 것이 싫은 거예요. 상대방에게 미안하고.


타인이 내게 써준 마음을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지만,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혹시 계기가 되어준 사건 같은 일이 있으셨을까요?


제가 장녀거든요.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어린 시절이 있었어요. 두 명뿐이지만. 아버지께서 아들 딸을 따지지 않고 저를 첫째로 명확히 세우셨어요. 동생 하고는 두 살 터울이지만, 제가 그런 태생이었던 것 같아요.


누구를 챙기고 마음을 쓰는 입장에 있다 보니, 역으로 누군가 나에게 마음 써주는 것이 더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셨던 것이군요.


여러 사람들이 남기고 간 마음들이 문에 붙어 있는 걸 보니, 사람들과 함께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사실,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해요. 고독이라고 하는 것을 잘 즐기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때 많은 생각을 하게 돼요.


두서없이 생각해요. 그래서 제게 ‘메모’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정돈되지 않은 내용을 써요. 해놓고 보면 나중에 정리할 수 있게 돼요. 과거에 적은 메모부터 오늘 쓴 메모들이 퍼즐 맞추듯 할 때 쾌감이 있어요.


메모를 정리하시는 모습을 보니 스스로를 아카이빙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스로가 연구의 대상이기도 하고요.


맞아요. 그래서 가끔은 제가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너무 내 생각만 하는 것 같아서요.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다거나, 내가 어떻게 해야 잘 될 수 있는지가 알고 싶은 것 같아요. 그리고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요.



작업실 서녘의 문, 2025 ⓒ작은도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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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서녘 부분, 2025 ⓒ작은도시이야기





어떤 분들께서 공간을 함께 사용하세요?


한 10분 정도 계세요. 하루 종일 계시는 경우는 거의 없고, 편하게 오가세요. 그리고 대부분의 분들이 수업 시간을 중심으로 공간을 활용하세요.


작업실 서녘 ⓒ서녘




어떤 이유로 을지로에 자리를 잡게 된 걸까요?


친구들과 2017년쯤 을지로를 많이 왔었어요. 그때 '호텔수선화'를 좋아했어요. 경기도에 사는 친구들도 쉽게 올 수 있는 버스가 많아 만나기에도 좋았죠.


일을 했던 화실은 대흥에 있었어요. 선생님께서 화실을 정리하시면서 자연스럽게 제 공간을 찾게 되었어요. 익숙한 을지로가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전거 타고 출퇴근할 수 있을 만한 거리였고, 친구들과 애정한 공간이 있어 익숙한 곳이었어요. 수업을 하기에도 오시는 분들의 접근성을 생각하면 좋은 곳이었고요.


발품을 팔면서 많은 공간을 알아보다 우연히 이 공간에 오게 되었어요. 도예작가인 은지 작가님이 이곳에서 ‘디오티’라는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고 계셨어요. 인근으로 이사를 가셨고, 제가 오게 되었어요.


이제 1년 반 조금 넘은 것 같아요. 작년 4월에 들어왔으니. 최대한 오래 있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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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이 그려진 창 안(좌), 밖(우), 2025 ⓒ작은도시이야기







친구 이야기




교류하시는 친구들이 있을 것 같아요. 인상적인 기억이 있다면 듣고 싶어요.


음, 우선 기억에 남는 대화가 하나 있어요. 아트룸 블루의 수빈님이 계세요. 저희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중 인상 깊었던 대화는 ‘사랑의 반대말은 뭘까.’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사랑의 반대는 죽음이 아닐까.’라는 결론을 내렸었어요. 이후 정확한 말은 기억이 안 나지만 수빈님이, ‘그런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것에 바탕에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온도의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 말에 많은 공감이 되었어요. 죽음이 있기에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체감하고, 굳이 이 귀한 시간에 싸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해요.


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친구가 있군요. 전에 아트룸블루(블루타운) 인터뷰를 진행한 기억이 납니다. 왠지, 작가님과 수빈님이 닮은 느낌이 있었는데 결이 같은 분이구나 싶어요.


그리고, 중구문화재단의 고등어(네트워킹 사업 담당 박지영의 닉네임)가 있어요. 꼭 작은도시이야기에서도 소개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고등어가 ‘중구 동네 친구 모임’에 초대해 준 적이 있어요. 당시 제가 팔로워가 100명 정도 있었을까요. 그럼에도 ‘질문하는 집’이라는 키워드를 보고 제안해 주었던 거예요. 그렇게 고등어 덕분에 동네 친구가 많이 생기게 되었어요. 참, 감사해요.


한 달에 한 번씩 동네 친구들을 만나는 모임이 있어요. 함께하면 참 편안하고, 의지할 수 있는 느낌이 들어요. 그들이 있어서 너무 다행이에요. 서로 각자의 색이 강한 사람들이고, 시작과 과정이 미세하게 다르지만 결국 결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아요.


고등어가 참, 안목이 좋으신 분이네요. 서로 비슷한 결로 살아야 가며 끌어당기다 고등어가 불씨를 붙여줘 기적처럼 만나게 된 것은 아닐까 싶어요.


그러고 보니 작가님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주는 긍정적인 영향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함께 고민하고 나아갈 수 있는 동료들이 인근 곳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은 개인이 많은 것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참 감사한 일이지만 쉽게 벌어지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만큼 작가님께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실 것 같고요. ‘인복’을 불러오는 분인가봐요.



KakaoTalk_20251030_174052911_04.jpg 중구 동네 친구 모임, 2025 ⓒ중구문화재단







내일 이야기




지금까지 해오신 일들 위에 앞으로 해나가고 싶은 일들이 많이 있으실 것 같아요.


‘중구 동네 친구’를 통해 친구들의 공간을 알게 되고, 그곳을 방문해 보면서 마치 고등학교 때 이동 수업을 하는 것 같았어요. 서로가 진행하는 수업들을 연결하면 ‘예술학교’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혼자 하는 게 아니라서 함께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대학에서도 신청해서 미대생들이 올 수 있고, 인근의 직장인, 주민들이 을지로의 공간들이 만든 것들을 잘 활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을지로에 이미 좋은 자원들이 많기 때문에, 함께 일을 도모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상상하시는 일들이 하나씩 이뤄져나가지 않을까 싶어요.


시간은 걸리겠지만, 오래오래 빠르게 그림을 하나씩 함께 그려나가면 좋을 것 같아요.



서녘의 창, 2025 ⓒ작은도시이야기







서로의 색이 스며드는 서녘



나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들이 내 안에 갇혀 맴도는 것이 아니라, 여러 형태를 빌려 계속 확장되어 가는 과정. 들숨과 날숨이 호흡을 만들듯, 내 안에 모였다가 밖으로 확장하는 순환을 반복하며 우리는 균형을 찾아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질문은 그 과정을 위한 걸음이 되어주고요.


제도와 장르가 규정한 기준에 맞추기보다, 자연스러운 나의 고민과 활동이 쌓이기에 ‘서녘의 예술’을 만들어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찾는 과정으로서의 창작, 회복과 사색으로서의 교육, 두서없이 놓칠 수 없는 순간들의 기록이 서로 꿰어져 어떤 영역을 만들어 나갈 것 같아요. 오늘 저는 그 과정의 어느 한순간을 목격하게 된 것 같습니다.


내일의 주류는 오늘 새로운 시작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지난 역사를 통해 알 수 있고, 더불어 우리는 근대의 틀로 만들어진 많은 기준들이 변하는 내일을 향해 점점 걸어 들어고 있고요. 질문을 잘하는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것들, 그리고 그것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이 높은 가치를 창출하는 시대가 오고 있어요. 예술의 역할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 것이고, 그에 맞춰 활동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 하나의 흐름으로 체감되는 시점이 곧 올 것 같습니다. 좀 과해 보이고 거대한 이야기 같으나 이미 큰 변화 과정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해요. 작가님께서 지금 쌓아 오신 일들이 서서히 새로운 영역의 하나의 모델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나눔의 방식을 만들어 가는 작가님과 '서녘'을 응원하겠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써 나갈 서사를 지지합니다. 오랜 시간 귀한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_MG_3446.JPG 서녘의 문, 2025 ⓒ작은도시이야기








작업실 서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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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MG_3424.JPG 지은서의 손, 2025 ⓒ작은도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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