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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똑띠 Oct 14. 2022

마음 캠프파이어(熱心)

습관적 일상

"공부 잘하고 싶다."


오늘 이야기는 이 문장에 다가서는 첫걸음에 대한 것이다.


-


'공부'의 정확한 의미부터 짚어야 하겠으나, 이 부분은 좀 지루하니 우선 과감히 넘어가도록 하자.


-


"공부 잘하고 싶다."


이 문장이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 번, 열 번, 백 번, 만 번, 그 횟수와 정도는 다양하겠지만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공부 잘하고 싶다."는 5000만 대한민국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까? 좋은 학원 찾기, 1타 강사 수업 듣기, 분위기 좋은 스터디 카페 찾아가기, 하루 순공 10시간 채우기, 동기부여 영상 보기, 잔소리 듣기, 좋은 코디 만나기 등 떠오르는 답은 다양하다.


특히 유튜브를 비롯해 다양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이런 답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나는 것 같다. 이 모두가 나쁜 답은 아니지만, 그다지 좋은 답도 아니다. 왜일까?


문제로 돌아가 보자. 학창 시절 선생님들께서 지긋지긋하게 말씀하신 "문제 속에 답이 있다."를 다시 꺼내볼 시간이다.


문제 속에 답이 있다.



-


["공부 잘하고 싶다."는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가 우리의 문제다. 이 문항의 핵심은 "공부 잘하고 싶다."가 아니라 '무엇부터 해야 할까?' 부분이다. 공부를 잘하는 여러 방법들 중에 "가장 먼저" 해야 할 것 하나를 고르는 것이 이번 문항의 출제 의도다.


자, 다 함께 소리 내어 속삭여보자.


"문제 속에 답이 있다."


-


독자님들.


소리 내어 읽지 않은 것, 선생님은 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겠어요.

왜냐고요? 선생님은 자비로우니까요.




-


"공부 잘하고 싶다."는 문장은 '공부하다.'라는 동사에 '잘'이라는 부사를 붙여 꾸민 문장이다. 그러니 문장 구조상 "공부 잘하고 싶다."는 문장은 '공부하다'라는 동사의 파생 상품 쯤 된다.


(실제로 "공부 잘하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겨 숱한 사교육이 등장하니, 문자 그대로의 파생 '상품'이라 볼 수도 있겠다.)


쓰여진 문장 자체가 그러하니, "공부 잘하고 싶다."는 간절한 알라딘의  외침에 우등생 지니는 어떤 답을 할까?


"

공부를 잘하고 싶으시다고요?

음...

공부를 하고 계시기는 한 거죠?

"



-


0 곱하기 100은 다시 0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씨를 심지 않으면 싹이 트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 아이들, 참 '동기부여' 좋아한다. 오늘도 한 아이가 교무실까지 놀러 와서 찾아와서는


"선생님, 요즘 공부가 너무 안 돼요."

라고 한다. 무엇 때문에 공부가 안 되는 것 같냐 물으니 하는 말이


"그냥, 요즘에 공부할 마음이 안 생겨요.

  동기부여가 안 돼서 집중이 잘 안 되는 거 같아요."

라고 한다.


나에게는 발작 버튼이 여러 개 있다. '누르지 마시오'라 크게 쓰인 투명 아크릴 뚜껑으로 덮어 놓은 새빨간 버튼. 그 중 몇몇은 특정 행동으로 누를 수 있고, 몇몇은 특정 문장을 말하여 누를 수 있다.


이를테면 '심심해요'라던가, '동기부여가 안 돼서' 같은 말.


아이는 무심결에 버튼을 눌렀고, 누군가는 10억 복권에 당첨된 마냥 신이 나서 잔소리를 우수수 발사했다.


-


잔소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우리가 쉽게 쓰는 말 중에 '열심(熱心)'이란 단어가 있다.  "공부 열심히 해."나, "너 참 떡볶이를 열심히 먹는구나." 하는 식으로 자주 쓰는 말이다. 이 열심이라는 단어는 '뜨거울 열(熱)'과 '마음 심(心)'을 합친 한자어다.


그런 고로 '열심'이란 '마음을 불태워' 무언가에 매진한다는 뜻이 된다. 뭉근히 오래 끓이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마음을 불태우겠다는 것인데, 아니 뭐 땔감이 있어야 불이 붙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집중이 되든 안 되든, 계획이 있든 없든, 일단 일을 시작한 후에야 그 사람의 마음에 불을 붙이고 기름을 끼얹는 것이다.


어찌 시작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마음이 있겠으며,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열심이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 어떻게 동기, 움직임을 일으킬 수 있냐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습관, 요즘 젊은이들 말로 '루틴'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컨디션과 상관없이, 오늘 기분과 상관없이 유지하는 삶의 일정.

직장인들이 출근하고 싶어서 출근하는 것이 아니고, 퇴근하기 싫어서 퇴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듯.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고 독서실로 향하는 수많은 수험생들의 발걸음이 그렇듯.


"그냥 하는 거지." 한 마디로 자신의 훈련을 요약하는 김연아처럼. 해가 지고 나서야 시간이 흐른 줄 아는 펠프스의 훈련처럼. 매 점심시간이면 빨간 제로콜라 한 캔을 들고 학교 외진 곳 벤치에 앉아 30분 조용히 앉아있는 김쌤처럼(... 응?).


아무 노력 않고도 자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그 삶의 관성이 있어야 하고, 그 관성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억지 노력까지 '동기부여'에 맡긴다는 것은 인생에서 0보다 작은 음수를 도입하려는 것과 같다.


대체 삶을 어디까지 소급하려는 것인가. 억지라는 인위적 노력으로 관성이라는 무위적 사태에 도달한 후에야 열심을 논할 수 있다. 일단은 그냥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인생에 마이너스는

통장 하나만으로 이미 벅차다.




-


오해 말기를 바란다.


동기부여, 중요하다. 다만, 동기부여는 밖에서 지펴진 불과 같은 것이라 어떤 요인에 의해 결국 꺼져버리기 마련이다. 상금이나 상품, 명성이나 출판 같은 외재적 동기부여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고, 그러다 보니 '재미'라는 내재적 동기로 글쓰기가 한동안 유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수상에 성공하던 실패하던, 공모전이 끝난 후엔 '재미'만이 남게 된다. 그 재미, 급격히 몰아치는 많은 일정과 스트레스에 삶이 피로하다 느껴질 때에는 사라지고 없게 된다. 그렇게 장작불은 새하얗게 식어버린다. 남은 재는 바람에 휩쓸려 흔적 없이 날아간다.


동기부여는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이벤트며 목걸이에 꿰어진 진주다. 진주가 주목 받기 위해서는 그것을 꿰어낼 금실  올이 있어야만 한다.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듯, 동기부여의 효과를 위해서는 평범한 일상, 삶의 관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고 싶을 때를 기다려야 하고, 하기 싫을 때에 마냥 놓아버리는 것은 관성의 자세가 아니다.


관성은

그냥, 하는 것이다.



-


나이가 들어가며, 그리고 하루의 번다함이 늘어가며 일관적인 일상이 점점 중요해져 간다. 물론 이따금 예상치 못한 사건들로 일상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기본적인 삶의 배경이랄까, 잔향이랄까. 삶의 습관을 갖고, 이를 다듬어 더 좋은 습관으로 만들어가는 나날의 즐거움과 유리함을 나날이 깨쳐가고 있다. 습관은 그 사람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품성이고, 최대한의 안정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누울 자리 봐 가며 발을 뻗는다는 말이 있는데, 동기부여 운운하는 이들에게 누울 자리란 결국 습관이라는 이야기다.


좋은 자리에서 잠도 잘 자는 법이고.



-


요약한 것이 여기까지다.


-


아이는 하얗게 질린 백지가 되어

교실로 돌아갔다.


-


결과적으로는 자리 앉혀 공부하게끔 인도하였으니,

성공적인 동기부여라 할 수 있지 아니한가?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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