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 있는 채소와 반찬이 더 오래되기 전에 털어야 했다. 그럴 땐 비빔밥만 한 게 없다. 냉장고 아랫칸 서랍을 열어 투명한 봉지에 들은 상추와 깻잎을 꺼냈다. 아직 생생한 것들을 골라내어 도마 위에 놓고 칼로 쓱 쓱 썰었다. 여린 잎채소를 자를 때면 칼질을 잘하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다.
다음은 반찬을 꺼내야 한다. 구석에 처박혀 있는 스태인 리스 반찬통에 손이 갔다. 당최 무엇이 들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 연두색뚜껑을 열기 전에 살짝 긴장을 했다. 다행히 꽈리고추가 들어간 멸치볶음이었다.
‘음..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참치가 더 낫겠다.’
싱크대 바로 위에 있는 찬장을 열어 노랗고 둥근 참치캔을 꺼냈다. 연두색 이불을 덮은 스테인리스반찬통은 냉기가 빠지기도 전에 다시 차가운 구석으로 들어가 몸을 숨겨야 했다.
냉장고 속에 들어갈 기세로 맨 위층부터 아래층까지 살펴봤다. 냉장고가 이제 그만 좀 보고 얼른 꺼내라면서 삐빅삐빅 소리를 냈다. 고추장, 열무김치, 고구마줄기볶음, 죽순나물에게는 합격목걸이가 주어졌다.
반찬통으로 탑을 쌓아 왼손에 받쳐 들고 오른손에는 집게와 가위를 들고 테이블로 갔다. 아, 양푼 먼저 꺼낼걸.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 양푼을 찾는데 아까 채소를 씻느라 양푼을 꺼내는 바람에 싱크대에 덩그러니 있는 양푼을 보니 왠지 쓰기가 싫어졌다. 양푼크기만 한 냄비를 꺼냈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음을 핑계 삼아 약간 어울리는 듯 안 어울리는 곳에 뜨겁게 데운 햇반을 넣었다. 계란프라이도 빠질 수 없다며 노릇하게 구워 잠시 대기시켰다.
뜨끈한 밥 위로 반찬을 잘게 잘라 넣고 참치캔은 시원스레 따서 기름은 쪼르륵 따라 낸 뒤 투하시켰다. 이제 계란프라이를 올리고 고추장을 듬뿍 넣은 후 참기름 두 숟갈 정도 넣으면 완성이다. 아직 밥이 군데군데 하얗지만 참지 못하고 한 숟갈 크게 떠먹었다. 지금도 맛있는데 다 비벼지면 얼마나 맛있을까 싶어 숟가락을 들고 가열차게 비볐다.
와구와구 먹으면서 삼순이가 생각났다. ‘내 이름은 김삼순’ 드라마에서 삼순이가 비빔밥에 쏘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꽤 어릴 때였는데 그 장면이 기억이 났다. 냉장고 오른편에 소주가 있었지만 오늘은 유통기한이 임박한 막걸리를 마시면서 하루를 털어냈다.
냉털 하는 날은 음식을 남기지 않고 책임졌다는 생각에 묘하게 기분이 좋다.
냉장고 속은 텅 비었지만 배는 빵빵해졌다.
글까지 털어낼 수 있으니 일석삼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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