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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넌니 Oct 16. 2024

사랑해봤냐는 질문에

박민규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재테크, 부동산, 주식, 청약까지 돈 냄새나는 일상 대화가 익숙해진 탓에 오랜만에 절절한 사랑 얘기에 몰입하려니 뭐랄까, 와, 음, 사랑이라니…..


책 제목은 들어보긴 했는데 솔직히 이런 사랑이야기일 줄이야?( 표지가 한몫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문장하나하나에 작가의 개성이 너무 물씬 풍겨서, 그러니까 비유와 은유, 가끔 으악 너무 올드해 싶은 언어유희도 많고, 또 곳곳에 강조점이나 쉼표가 아닌 행 바꿈으로 호흡을 나누는 뜬금없이 토막 난 문장들이 많아서 한 문장을 두세 번 왕복하며 읽었던 부분들도 많았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못생겼길래?

동정심인데 사랑이라고 착각한 게 아닐까…?

하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꽤 감정이입하고 있는 나를발견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갑자기 사라지고 주인공이 겪는 생활들이 묘사되는 부분부터다. 잘 지내냐고 대답 없는 안부를 물어본다던가, 아무렇지 않게 열심히 살다가 갑자기 울컥해서 눈물이 난다던가, 나는 혼자고 또 멈춰있는데 세상이 나만 빼고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느낌이라던가, 사랑이 없는 생활들을 살아가는 ‘나’의 일상들을 보며 맞아, 그랬었지 몇 번이나 감탄을 했더랬다.



마음에 한 사람이 들어오면 마치 쿠키틀로 생지를 꾹 눌러 쿠키를 만드는 것처럼 딱 그 사람 모양대로 깊은 구멍이 뚫리는 것 같다. 틀 안 쪽 구멍의 가장자리는 힘을 주어 마음을 쓴 탓에 선명하게 잘려나가 어느 각도에서나 그 사람 모양이고 틀 밖은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말랑한 생지 같은 마음이다. 그 사람이 평생 있을 것처럼 단단히 머물던 자리가 남긴 구멍이라 다른 것으로는 좀처럼 메우기가 힘들어서 부족하거나, 넘치거나, 억지로 맞추다가 서로 상처만 나거나 하는 바람에 결국엔 쉽게 맞춰볼 생각도 들지 않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맞춰볼까 했었던 준수한 군만두들도 분명 있었던 것은 맞다. 뭐 …그렇다한들 그 사람 모양이 아닌 탓에 결국에 그들은 내 기억 속 ‘군만두‘ 카테고리 안에 기억될 뿐이다.


*소설에서 군만두는 예쁜 여자를 의미, 나는 외모가 준수한 이 정도로 해석.





이별이라는 게 모세혈관까지 뿌리내린 나무 하나를 통째로 흔들어 뽑아버린 듯한 …

따위의 문장이 있었는데, 나는 그 마음 한 톨 한 톨 모두 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살다 보면 우리는 가끔 아주 사소한 것에도 ‘아 지금 이거 앞으로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다.’ 고 꽤 확실한 느낌이 드는 몇 안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몇 년 후에 복기하더라도 사진을 찍어 놓은 것처럼 선명하고 더러는 향기도 기억난다.(…) 결국 사랑도 이별도 정확한 내막은 너랑 나랑만 아는지라, 다른 이에게 아무리 잘 전달하려고 해도 결국에는 시시콜콜하고 진부한 과거밖에 될 수가 없다. 너랑 나랑만 아는 이야기였는데 네가 없어지면 나는 그 굉장한 순간들을 세상에서 혼자 알고 있는 사람이 되는 거더라고.



이별의 방식, 이별을 서서히 받아들이는 일상들, 그리고 객관적으로 예쁜 군만두를 보는 ‘나’의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들이 굉장히 디테일하고 자연스러웠다. 여자만 알 수 있는 공기, 눈빛, 표정을 이 남자는 진심으로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 작가 ‘찐으로’ 이별, 사랑, 예쁜 여자, 그렇지 않은 여자 다 몸소 겪어봤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문장들이니까.


지나칠 수 있는 그 사소한 순간들이 순간 멈추면서 환하게 빛나는 경험들이나 명치가 아리고 마음이 물이잠기는 것 같은 먹먹한 상실감이나, 그들이 군만두들로 밖에 안 보이게 되는 순간들을 경험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다 너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너 덕분이더라. 비록 마지막은 아주 아주 아팠지만.



적어도 누가 사랑해 본 적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럼요.라고 얘기할 수 있는
근사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너랑 나랑은 만날 수밖에 없는, 만날 필요가 있었던 연이었다고 이제 나는 안다는 거지. 작가 말처럼 사랑하는 이가 없는 일상은 정말 말 그대로 생활일 뿐이다. 오글거리지만, 사랑이 답이다.


이렇게 너랑 나랑만 아는 얘기를 글로 남기고 보니 신성한 독후감이었는데 또 이렇게 시시콜콜하고 진부해졌다. 하, 켄터키 치킨이 그리워지는 밤이다.


잘 지내지?

난 아주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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