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농담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얼마 전 여행 가던 날 아침, 용산역.
나는 백팩을 메고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50대 중후반쯤? 감청색 앞치마를 두른 사장님은 능숙하게 샷을 내리고 얼음을 채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기 시작했다. 오, 큰삼촌이랑 닮았다 생각하던 찰나 사장님이 내 쪽을 힐끗 보시더니 여행 가시나 봐요?라고 말을 건네셨다. 오랜만에 가는 여행이라 들뜬 것도 있었고 누가 봐도 여행가는 사람 얼굴이었나 싶어 네~ 여행 가요! 단풍 보러!라고 기분 좋게 답해드렸다. 그러자 사장님이 오 남자 친구랑 가시나 봐요?라고 말을 이었다. 내 대답과 질문 사이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 와 .. 초면인데 질문이 상당히 구체적이시네 싶으면서도 뭐 워낙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하시는 분이니까 그럴 수 있지 싶어 아니요~ 남자 친구는 없고 지인들이랑 가요!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어~? 그래요? 나도 여자친구 없는데!라고 답변하는 게 아닌가?? (참고로 본인은 30대…)
???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네?? 했더니 이제는 혹시 남자 친구 안필요해요?라고 능글맞게 웃으면서 물어보시는게 아닌가? 커피를 건네주는 그 짧은 찰나,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사장님 표정을 목격하고서 하 쒸, 당황하면 지는 거다 싶어 어머, 무슨 농담을ㅎㅎ 감사합니다!라고 서둘러 커피를 받아 들고 까페를 나왔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플랫폼으로 터벅터벅 내려가는데 곱씹을수록 황당하고 불쾌했다. 아니 아저씨. 농담도 정도가 있는거죠. 누가 봐도 50대 아저씨신대요. 살짝 미치신 건지?
자리에 앉아서도 내가 씩씩거리니까 얘기를 전해 들은 친구들은 푸핫 중년에게 플러팅이라니 부럽다며 놀리기 바빴다.
아니 진짜 그런 농담이 재밌다고 생각을 하는 걸까? 아니면 진짜 될 거라고 보고 찔러보는 건가?
KTX가 대전역을 지나가는데도 분함이 풀리지 않았다. 고민할 가치도 없지만 그렇게 까지 굳이, 말을 거는 심리가 진심으로 궁금했다. A는 그 아저씨는 만만한 여자 손님들이 왔을 때마다 일부러 짓궂게 질문을 하고서는 당황하는 표정을 즐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아저씨들 한 둘이 아니라고. 이에 B는 아저씨 말의 반은 진심일 거라고 했다. 찔러보고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라는 심리라고. 질문을 되새김질해보면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긴 하다. 질문 자체가 얼마나 간결하고 효율적인가? 누구랑 가느냐가 아니라 남자친구랑 가는 것이냐고 딱 집어서 묻는 점이 그렇다. 두 마디 만에 사장님은 내가 지인들이랑 단풍놀이 가는 솔로라는 것을 알아냈으니까. 물론 곧이곧대로 답변한 나도 나지만, 오랜만에 여행 가는 날이었고 아침부터 날카롭고 싶지 않았다.
근데 왜 항상 저런 농담은 아저씨들이 할까? 아주머니들은 거의 없지 않아? 차창쪽에 앉은 친구 C가 턱을 괸 채로 말했다. 같은 연배라고 했을 때 자기보다 훨씬 어린 사람을 대할 때 이성이라는 전제로 접근하는 것은 늘 아저씨들이라는 것이다. 아주머니들이 젊은 남성한테 호감을 표하는 경우는 우리 아들이었으면 좋겠다, 혹은 우리 딸 소개 시켜주면 좋겠다 같은 느낌인데 반해, 아저씨들이 젊은 여성한테 호감을 표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그 상상 속 관계의 주체가 아저씨 본인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것도 적지 않은 기대치를 가지고.
나 포함 5명 모두 만장일치로 맞네! 진짜! 대박! 이라며 통찰력 넘치는 친구의 말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들 모두가 주변에 나이차가 한참 나는 젊은 여성을 자기와 발전 가능성 있는 이성으로 대하는 아저씨들 한 두 명쯤 발견하는 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애초에 어떤 자신감을 가지면 그게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고 희망이라는 걸 품는 걸까.
농담이라고 하기엔 죄송한데 하나도 웃긴 부분이 없으시고요, 조금 적극적인 스몰 토크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면이 데다가, 진담이라고 하기엔 어이가 없을 정도의 나이차가 나거든요. 아저씨. 차라리 누가 봐도 70대의 어르신이셨으면 기분 나쁠 것도 없이 오히려 손주 며느리 찾으시는 거냐고 넉살 좋게 되받아 쳤을 것 같다. 그건 의심할 여지없는 농이니까.
그렇다고 저런 농담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상해질 수 있는 게 상대방이 농담이었다, 웃자고 한 얘기다라고 웃으면서 발뺌해 버리면 그만이다. 결국 진지하게 반응한 나만 예민한 사람이 돼버리는 것이다. 굳이 지금 상황을 비유하자면 마치 누군가 밟을 걸 기대하면서 일부러 뱉어 놓은 걸쭉한 가래침을 내가 아주 보기 좋게 밟은 느낌 같다고 할까. 일부러 뱉었다는 걸 알았지만 피하지 못하(않)고 밟은 건 내탓인게 맞고, 그렇다고 가래침 밟은 걸로 화내기도 뭐 하고, 그럼에도 어쨌든 남이 뱉은 지저분한 가래침이니까 불쾌하고 찝찝한, 뭐 그런…?
나는 어떻게 반응했어야 할까.
뭐라고 얘길 했어야 그런 농담에 기분 나쁜 사람도 있다는 걸 확실히 전할 수 있었을까. 무슨 말씀하시는 거냐 정색하면서 무안을 줬다면 달라지는게 있었을까. 타격감이나 줄 수 있었을까. 아니면 내가 뭐라고 답했든간에 결국에 희롱당하는 기분을 느끼는 쪽은 나라는 결말은 변함이 없었을까.
변함없이 용산역 그 자리에서 젊은 여자 손님만 골라 무례한 질문을 재미삼아 던지고, 당황하는 반응을 두근두근 기다리고 있을 늙은 아저씨를 생각하니 진심으로 소름 돋는다. 17세 연하의 어린 신부♥ 같은 나이차를 앞세운 연예기사 헤드라인이 오늘따라 한층 더 구려 보인다.
농담도 정도껏 하셔야 재밌죠.
아저씨 군대 갔을 때 저 탯줄 잘랐을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