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안 Aug 26. 2021

우리가 여기에 있어

<내가 여기에 있어>

“아저씨, 에어컨 좀 꺼주세요! 제발요!”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빈활(도시빈민활동) 마지막 날의 일정을 소화한 우리 학보사 기자들. 용산역 광장에서 2박 3일의 일정을 마무리하는 해단식을 한 우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사람이 많아 옹기종기 서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에어컨은 어찌나 빵빵 틀어대시는지. 비를 쫄딱 맞은 우리는 온몸이 덜덜 떨려서 급기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사 아저씨를 향해 이렇게 입을 모아 소리쳤다. 기사 아저씨는 난데없이 웬 대학생들이 에어컨 좀 꺼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지 의아해하면서도 다행히 바로 에어컨을 꺼주셨다. 앉아있는 승객들은 매서운 눈길을 보냈지만. 정말 그날처럼 에어컨 바람이 소름 끼치도록 싫었던 적이 또 있었을까? 빈활 이야기만 나오면 그날의 에어컨 사건은 두고두고 우리 안에서 회자되곤 한다. 누구 목소리가 제일 컸다며 서로를 저격하면서.  


98년도 여름은 정말 억수로 비가 많이 왔다. 대학 입학 후 첫 여름 방학, 나는 학보사 수습기자로 난생처음 겪는 온갖 경험들을 하루하루 소화해내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돌아보면 내 인생의 가장 뜨거웠던 시간이기도 했던 그때는 하루가 마치 48시간처럼 길었다. 아침 9시 출근 후부터 쉴 새 없이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읽을 것도, 토론할 것도, 배워야 할 것도, 학교 밖으로 나가서 보고 느껴야 할 것도 많았다. 그래도 명색이 대학에 들어와서 첫 여름 방학인데. 남들은 들로 산으로 놀러도 가고 데이트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는데. 우리 동기 11명은 주 5일 주야장천 가정관 지하 학보사 사무실 큰 책상에 둘러앉아 매일 무언가를 읽고 쓰고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방을 잡아서 며칠 동안 같이 먹고 자면서 하루 종일 토론만 하는 합숙 훈련도 있었지 참. 그러면서 고등학교에서는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세상, 특히 사회의 음지를 알아가면서 조금씩 눈을 뜨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곳이 얼마나 좁은 우물 안이었는지를. 


그중에서도 압권은 단연 도원동에서 2박 3일간 진행했던 빈활이다. 강제 철거 후 용산구청 앞에서 노숙을 하며 항의 집회를 이어오고 있는 철거민들의 활동에 학보사 기자들도 동참한다는 거다. 집회 자체도 낯선데, 저들이 도대체 왜 저렇게 투쟁가를 목청 터지도록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는 그 대열에 함께 서서 팔뚝질을 하고 있었다. 지하철 모금 활동은 여러 학교 학생들을 섞어서 팀을 짜서 했는데 나는 우리 팀장 오빠가 열차 안에서 구호를 외치는 동안 앉아 있는 사람들 앞에 모금함을 들이미는 역할을 맡았다. 행여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어찌나 마음을 졸였었던지. 그리고 이어지는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 정말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빈활에 왔구나를 절감한 건 바로 용산구청 앞에서 박스를 깔고 잤던 노숙이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눈앞에서 자동차가 휙휙 지나가는 장면이란. 둘째 날은 다행히 상황이 조금 나아져서 거리 한복판은 아니었다. 숭실대 어느 한 건물의 옥상에서 눈을 뜨자 아침의 청아한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공중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고 고양이 세수를 한 후 우리는 “바위처럼 살아가리라” 노래와 율동으로 하루의 일정을 시작했다. 

빈활에서 돌아왔지만 수습의 고된 일정은 쉼 없이 이어졌다. 하루 종일 수도권 지역의 집중 호우로 여기저기 물난리가 나던 8월의 어느 날엔 서울대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열린 문으로 빗물이 버스 안으로 들이닥쳤다. 빗물의 수위가 너무 높아서 버스 계단을 가뿐히 넘긴 것이다. 더 이상 버스가 움직이지 못하자 우리는 중간에 내려서 무릎까지 잠긴 채로 흙탕물을 가르며 무작정 걸었다. 정말 이러다 물에 떠내려 가는 거 아닐까 공포가 엄습했지만 진격의 기자들은 어찌어찌 그 물난리를 뚫고 세미나장에 도착했다.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박장대소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 2년 동안 이렇게 함께 먹고 자고 치열하게 살았던 우리 동기의 끈끈한 인연은 벌써 20년을 훌쩍 넘었다. 이제는 다들 결혼을 하고 하나 혹은 두 아이를 낳고 수도권 도처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젊은 날의 치기나 열정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간혹 단톡방에서 누군가가 추억 돋는 한 마디만 날리면 그때부터 우리의 수다 폭탄은 빵빵 터지고 밤새도록 그칠 줄을 모른다. 직장에서의 억울한 일, 아이들 교육 문제, 남편에 대한 불만 등 각자의 고됨을 풀어놓으며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우리의 단톡방은 늘 언제나 내 마음속 1순위 방이다. 어쩌다 하루 일찍 자는 바람에 놓치면 아침에 +300의 대화를 정주행 하며 지하철 안에서 혼자 키득키득 웃으면서 출근하곤 한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함께 늙어가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위안이 되어주는지. 하버드대에서 진행한 75년 인생 관찰 연구 결과 품위 있는 노년을 맞이한 이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오래된 친구들과 계속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거라던데 우리도 품위 있게 늙어갈 수 있으려나. 



3년 전 여름, 만난 지 20주년을 기념하여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해외에 있는 한 명과 사정이 있어 못 온 한 명을 제외하고 7명의 동기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하나둘씩 김포공항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뜬구름 같던 우리의 꿈이 실현됐다는 게 어찌나 감개무량했던지 다들 상기된 얼굴로 실실 웃음을 쪼개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 위주로 여행 일정을 잡다 보니 우리들만의 시간이 너무도 간절했다. 그래서 미리 내가 계획해 놓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오름 등반. 불혹의 여인들 일곱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새별오름을 오르기로 했다. 해발 500미터 정도라 정상까지 30분 정도면 오를 수 있는 오름이라고 해서 골랐는데 막상 도착하니 웬걸. 경사가 70도는 더 되지 싶었다. 이 나이에 이런 급경사길을 오르란 말이야.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 간신히 정상에 오르니 때마침 해가 뜨면서 하늘이 연한 핑크와 보랏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너무나 멋진 하늘 풍경을 360도 파노라마로 담으면서 그 모습을 찍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도 함께 담았다. 모두가 초췌한 생얼이었지만 새별오름 정상의 기념비 앞에서도 단체 사진 한 컷. 사진 찍기를 싫어한 친구도 있었지만 그래도 오늘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 아니겠니. 풋풋한 새내기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20년의 세월의 흔적이 여기저기 내려앉은 중년의 여인네들 모습이어도 이 기념비적인 순간을 박제해놓아야지. 인생의 새벽녘을 함께 한 벗들이 이제는 모두 각자의 가정을 꾸리며 인생의 오후를 함께 걸어가고 있구나. 괜스레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새별오름을 내려오는 길은 경사가 완만해서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면서 앞서 걷는 친구들의 뒷모습도 찍을 여유가 있었다. 우리도 젊은 날 우리의 신념만을 붙잡은 채 옆도 보지 않고 가파른 정상만을 향해 뛰어올랐지만, 이제는 아이들을 양육하고 주변을 돌아보면서 천천히 내리막길을 걸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2000년에도 학보사 퇴임 기념으로 동기들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당시 제주도에서 일하고 있던 아빠가 공관을 오픈 해준 덕에 우리는 그곳에서 지내며 아주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자전거로 해안도로를 달리기도 하고 밤에는 제주에서 가장 핫하다는 나이트도 갔었다. 심지어 부킹까지. 우도에 가서 수영복도 입지 않은 채 에메랄드 빛 물속을 뛰어다니며 놀았던 20대의 풋풋한 청년들이 이제는 곽지 해수욕장에서 물놀이하고 돌아온 아이들을 땀을 뻘뻘 흘리며 씻기고 있는 모습이라니. 정말 가는 세월 그 누가 막을 수가 있으랴.  

 

엊그제 카톡의 대화 주제는 안마 의자였다. 내가 둘째 젖을 먹이다가 담에 걸렸다고 하니 다들 안마 의자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세라잼’과 ‘휴테크’ 중에서 고르라는 거다. 정우성과 이정재 중에서. 난 정우성 할래. 그러면서 육퇴 후 오랜만의 수다 한 마당이 또 시작되었다. 자기는 휴테크 없었으면 이번 학기 대학원 기말 페이퍼 못 썼을 거라며 강력 추천하는 친구도 있고 말이다. 얘들아. 우리가 정말 ‘반민중적 구조조정 저지와 민중생존권 사수’의 구호를 함께 외치던 기자들 맞지?^^


아드리앵 파를랑주 글 그림 <내가 여기에 있어>


<내가 여기에 있어>은 누군가 한 소년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잠에서 깬 소년은 베개를 들춰 뱀의 꼬리를 보게 된다. 그리고 창문을 넘어 밖으로 나와 정원을 지나 담장을 너머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뱀의 몸통을 따라 걸어간다. 집을 떠나 꽤 먼 곳으로 걸어갔는데도 계속해서 용기를 잃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어느덧 도시를 지나 숲으로 가고, 어둠이 찾아와 뱀의 몸통 밑 잠잘 곳을 찾아 눕는다. 해가 뜨자마자 다시 길을 떠난 소년. 그러다 살금살금 동굴로 들어가 마침내 뱀과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친구도 없이 외롭게 지내던 뱀은 소년을 보고 너무나 반가워한다. 하지만 뱀에게 소년은 여기까지 걸어오며 뱀이 베푼 많은 일들을 이야기해준다. 누군가의 우산이 되기도, 베개가 되기도, 다리가 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뱀은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된다. 소년은 다시 뱀을 보게 된다면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선 두 개를 그려 준다며 둘만의 신호를 만든다. “내가 여기에 있어.”란 뜻으로.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특히 첫째 육아휴직 때는 처음 겪는 육아 세계에 심신이 지쳐있는 데다 세상과 단절된 고립감에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나의 다정한 동기들은 어김없이 내게 카톡을 보내고 집에 와서 음식을 해주고 갔다. 내 인생의 보물과 같은 동기들이 있어 지금의 두 번째 육아휴직도 처음만큼 힘들지 않다. 잊을만하면 열리는 수다방에서 죽는소리 한번 하고 나면 뭐든 다 풀리고 마니까. 그리고 널 위해 기도해준다는 진심 어린 말을 듣고 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이 솟는다. 너는 절대 혼자가 아니야.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데를 끊임없이 알려주는 우리들. 마음이 한껏 낮아져 있을 때라도 내가 했던 지난날의 많은 일들을 기억나게 해 준다. <내가 여기에 있어>의 뱀처럼 손가락으로 꾹꾹 카톡을 남기면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여기에 있음을 알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밤마다 숲을 헤매는 부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