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이 강을 따라갔을 때>
세상만사가 그런 것 같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 그저 궁금해서 강물에 손 한번 담가 보려고 했던 일이 엄청난 모험으로 이어진 <곰이 강을 따라갔을 때>의 주인공 곰처럼 말이다. 돌아보면 내 삶의 물결도 나를 굽이굽이 알 수 없는 곳으로 이끌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 줬고, 내 인생의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연들을 만나게 해주기도 했다. 내 마음속에서 움튼 자그마한 호기심의 싹이 강물을 따라 흘러가 보지 않았으면 절대로 몰랐을 세상으로 나를 인도해 준 거다. 지금의 자리에 서 있는 내 모습은 그렇게 얼떨결에 시작된 갖가지 인생의 모험이 쌓인 결과일 테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대학 입학 후 학보사에 들어간 일이다. 중학교 때부터 연세대 농구팀을 좋아했던 나는 왠지 모르지만 그 대학의 신문사 기자가 되어 선수들을 인터뷰하는 게 내 팬심을 최고로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에게 나의 사심 가득한 동기를 이야기하며 공부를 더 열심히 한 적이 잠깐 있기도 했다. 막상 입시를 치르면서 그 마음은 기억 저편으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난 그 대학에 지원조차 안 했고, 또 못했다. 그래도 대학 신문사 기자의 꿈은 마음속 깊숙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축제 준비의 열기로 학교 안팎이 시끌시끌했던 5월 초, 캠퍼스 안을 걷다가 발견한 수습기자 모집 공고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읽어 내려갔다. 배 속에서 뭔지 모를 몽글몽글한 느낌이 꿈틀대면서 이곳에 발을 담그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결국 발을 담그다 못해 풍덩 빠지고 말았지만. 학보사 생활을 통해 겪은 온갖 모험과 그 속에서 만난 평생 친구들. 지금까지도 내게 더없이 소중한 인연이다. 저마다 따로따로 살아온 우리가 스무 살 무렵에 만나 40대가 되도록 이렇게 함께 있게 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다. 그래서였나. 작년 크리스마스 날 밤, 랜선 송년회를 하며 이 책을 읽어주던 내 마음도, 듣고 있던 동기들의 마음도 뭉클해졌다.
그동안 여러 친구들은 저마다 따로따로 살아왔어. 여기 이렇게 함께 있게 될 줄 몰랐단다.
비록 지금은 저마다 엄마로, 아내로, 직장인으로, 딸로, 며느리로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며 분주한 삶의 여정을 따라 따로따로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 또 20대의 우리처럼 다시 뭉쳐서 신나는 모험을 떠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날의 모임은 모두의 마음속을 따듯하게 달군 채 막을 내렸다. 다시 생각해도 그때 학보사를 지원하지 않았다면 이 책의 뒷면지처럼 내 인생의 숲이 이처럼 총천연색으로 밝고 푸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돌아보면 성인이 된 이후의 내 삶은 늘 그런 호기심 어린 작은 손짓에서 시작된 것 같다. 대학 시절, 미국의 대학 생활은 어떻게 다를까 궁금증에서 출발해 펜실베니아 한 시골 마을의 작은 여대로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캠퍼스 안에 마구간이 있던 독특한 학교에서 순전히 호기심으로 승마 수업을 신청해서 말타기를 배웠던 일도 이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내가 살면서 말과 교감을 해볼 수 있을 줄이야. 대학 졸업 즈음 방송국에서 잠시 보조작가로 일했던 것도, 졸업 후 외국 음반사에 취업을 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것도,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을 다녀온 것도 모두 내 단순한 호기심의 발로였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한국에 돌아와 새로운 직장에 들어가기 전 잠시 생긴 여유를 틈타 도쿄에서 석 달간 어학원을 다니면서 혼자 살아본 경험도 마찬가지다. 잠시 여행객으로 머무는 일본이 아니라 현지인처럼 한번 살아보면서 느끼는 일본은 어떨까 하며 그저 궁금했던 마음이 커진 나머지 그동안 쌓아놓은 항공사 마일리지로 도쿄행 비행기 티겟을 끊었다. 지금이야 에어비앤비로 해외 한달살이도 많이들 하는 시대지만 10년도 더 전에 혼자 낯선 나라에 가서 살아보는 여행이라니. 그곳에 있으면서 매일매일의 다이내믹했던 시간들은 지금도 떠올리면 웃음이 피식 나는, 무모하리만치 신나는 모험이었다. 아~ 내 평생 다시는 못 올 꿈같은 시간이여~
그리하여 지금 내가 철버덩 빠져서 신나게 물줄기를 타고 흘러가고 있는 강물은 바로 그림책 세상이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어느새 그림책의 매력에 서서히 물들어 가던 나. 그저 재밌어 보인다는 이유로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열린 ‘그림책 읽는 어른’이란 수업에 들어간 게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아이가 막 네 살이 되던 해였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쏙 빼놓고 함께 모여 그림책을 읽는다니. 낯설고 신기하면서도 너무 궁금했다. 그런데 웬걸. 이렇게 가슴 따뜻한 시간이 얼마만이었던가. 김은미 작가님의 가이드로 20대 유치원 교사부터 50대 초등학교 교사까지 다양한 연령의 여성들이 늦은 밤까지 그림책을 한 줄 한 줄 낭독하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주인공이 나와 같다며 연신 공감하면서. <이렇게 멋진 날>을 읽으며 유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가 <선 따라 걷는 아이>를 읽으며 사회가 정해준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림책이라는 거울에 비춰 하루하루 고달픈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도 했다. 어느 날엔가는 <리디아의 정원>을 읽다가 이유도 모르게 울음이 터진 20대 참가자를 토닥토닥 다독여 주었다. 그렇게 함께 그림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한 배를 타고 신나게 강을 따라 흘러내려갔다. 늘 배 안에 가득했던, 그림책이 주는 온기를 느끼며 말이다. 김은미 작가님은 당시 <마음이 머무는 페이지를 만났습니다>를 구상하고 막 집필을 시작하시려던 시점이었는데 그때 클래스에서 나눈 내 이야기가 이 책에 살짝 담기기도 했다.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 #그림책모임을 팔로우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어른들, 특히 엄마들이 전국 각지에서 그렇게나 많은 그림책 모임을 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해 봄 직장에서 스트레스가 엄청 심했을 때, 좋아 보이는 한 그림책 모임에 들어갔다. 그 모임을 이끌었던 분이 이제는 책을 세 권이나 출판한 이화정 작가님이다. 격주로 합정동 어느 카페에서 만나 좋은 그림책을 소개받고, 함께 읽고 나누는 모임이었는데 세상에 이렇게나 좋은 그림책이 많다니 매번 모임 때마다 감탄을 거듭하며 그림책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됐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는 봄과 가을 두 시즌 동안 양육자들이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읽는 모임에 나갔다. 주로 모였던 장소는 인왕산 자락길에 있는 한옥으로 지은 청운문학도서관. 너무 운치 있고 아름다운 공간에서 아이들과 부모들이 그림책을 두고 함께 어우러지는 정말 진귀하고 뜻깊은 시간이었다. 이따금 부암동의 숨은 명소, 백사실 계곡에 돗자리를 펴놓고 그림책을 읽기도 했는데 그때의 푸르른 하늘과 나무,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뛰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러다가 작년 봄, 나의 그림책 사랑에 불을 지핀 두 가지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어른의 그림책>과 <너는 나의 그림책>을 쓰신 안개향 작가님의 그림책 에세이 수업과 최근 <그림책 페어런팅>을 내신 그림책 기획자, 번역가이자 그림책테라피스트이신 스토리캣 김세실 선생님의 마더북 그림책테라피스트 양성과정을 수강한 것. 이번에도 역시 그저 한번 해볼까란 호기심으로 수업을 신청한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오랫동안 가슴 한편에 해보고 싶은 마음만 가지고 있었는데 육아휴직 기간 동안 정말 앞뒤 안 재고 손을 담가 본 거다. 그림책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면서는 일상을 살면서 내 안에 고여 있던 단상들이 그림책에 기대어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져 나오는 과정이 너무 신기하면서도 꽤나 즐거웠다. 아직 완벽한 모습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글 쓰는 엄마들이 매일 밤 10시에 보내는 감성 충만 뉴스레터 '심야메일' 시즌2에 객원필진으로도 참여하게 되었다. 모두 출간 작가인, 쟁쟁한 정기 필진 틈에 살짝 숟가락 얹어보는 경험도 이때 아니면 또 언제 해보겠냐 싶어 그냥 살며시 손을 담가버렸다. 그림책테라피 역시 안 배우면 어쩔 뻔했나 싶을 만큼 감동의 순간을 여러 번 선사했다. 이 모험의 시간을 통해 정말 새롭고 귀한 관계도 이어져 한 배에 올라탔다. 이 여정은 아직 한참 진행형이기에 앞으로 어떤 길이 펼쳐질지 더욱 기대가 된다.
늘 흐르는 강이 곁에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 손을 넣는 호기심이 없다면 인생은 정말 무미건조한, 잿빛 숲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그저 궁금해서, 그저 재밌어 보여서, 그저 마음이 동해서, 그렇게 손을 담가보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내 앞에 어떤 신나는 모험이, 어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언제든지 강물에 풍덩 빠질 준비가 되어 있다면 좀 더 컬러풀, 원더풀,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