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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토닥 Mar 21. 2023

치과에서 배운 인생의 쓴 맛

[회피편] 도망치면 사라질 줄 알았는데 두 배로 돌아온 고통


무조건 도망치고 싶은 순간

난 성격상 주어진 일을 빠르게 처리하지 않거나 완벽하게 끝내지 않고 중간에 그만두는 걸 못 견뎌하는 타입이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일처리가 빠르다.', '완벽주의형 인간이다.'라는 말을 곧잘 듣곤 하는데 그런 나도 매번 미루고 미루다 더 크게 일을 치르는 경우가 한 가지 있다.


그건 바로 '치과진료'.

치과에 간다는 상상만으로도 스트레스 지수가 급격히 치솟기 시작하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낀다.

의사에게 입 안을 보여주는 것도 창피하고, 날카롭고 무서운 기계소리를 들으며 말도 못 한 채 주야장천 입을 벌리고 있을 생각을 하면 그야말로 '고문' 당하는 기분이다.


거기에다 갈 때마다 무섭게 발생하는 진료비까지 더해지니 치과는 그야말로 내게 '공포' 그 자체이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온갖 핑계를 대가며 치과에 가지 않으려고 했고, 성인이 돼서 건강검진을 받을 때도 치과검진은 자체 스킵한 적이 있을 정도로 치과 공포증이 심한 편이다.

치과 진료 의자에 앉아 입 벌리고 있을 때 내 기분과 상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다.

임신을 하고 중기를 넘어가기 시작하니 이를 닦을 때마다 잇몸에서 피가 철철 나기 시작했다. 그저 임신기 증상인 줄 알고 넘어갔으나 출혈은 출산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래도 치과에 가기 너무 싫었다. 심지어 가족 중 치과의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어라고 괜찮은 척하며 치과에 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참을 수 없는 치아 통증을 느꼈고 거울로 입 안을 들여다보니 잇몸은 퉁퉁 부어 있었다.

도저히 참아지지 않는 이 시림과 통증에 나는 결국 내 발로 치과를 찾아갔다.

진료 의자에 앉는 순간부터 극한의 공포가 찾아왔고, 의자를 눕혀지는 순간 엄청난 패닉을 느꼈다.


'제발 별일 없어라...'를 수백 번 외치고 있는데 청천벽력 같은 의사의 한 마디.

"잇몸이랑 치아 상태가 너무 안 좋네요. 왜 이제 오셨어요…. 아휴 참…."

창피함+공포+앞으로 닥칠 시련에 대한 불안이 콤보가 되어 심장을 조여 오고 있는 와중에

향후 치료방향과 기간, 금액에 대한 설명까지 들으니 그야말로 '참담'했다.

백만 원이 훌쩍 넘는 치료비, 9개월가량의 치료기간, 마취 횟수.


매일 양치도 열심히 하고 치과에 가기 싫어 음식도 잘 먹는 내게 이런 시련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지만 다 내 업보인 것을 어찌하리오.


갑자기 치과에 안 가고 버티고 앉았던 나 자신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하면서 나의 모든 '회피'의 시간들이 '후회'의 시간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한숨을 듣는 순간 정말이지 펑펑 울고 싶었다.
도망친다고 사라지진 않더라

앞으로 50년은 더 써야 할 내 몸의 일부인데 선택의 여지가 어디 있으랴.

그날부터 난 한 주도 빠지지 않고 9개월을 치과에 다녔다. 갈 때마다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을 그곳에서 고문(?)당해야 했다.


어떤 날은 얼마나 긴장을 하고 몸에 힘을 줬던지 어깨가 뻐근하고 머리까지 아픈 날도 있었다.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반사적으로 의에 눕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그러다 보니 9개월의 치료가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치료를 마치고 병원을 나서던 날,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미룬다고 피해지는 일이 아니라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버티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빨리 해치워버리자.'

치과에서 인생의 한 토막을 배운 것이다.


너무 괴로워서, 무서워서,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무작정 회피하고 있었는데 내가 도망친 시간만큼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고 후에 큰 대가로 다시 나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불변의 진리였던 것이다.


물러서지 않을 용기

회피형(avoidant personality) 성격의 패턴은 '인간관계'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아 애초에 사람을 곁에 두지 않는다든가,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은둔하는 생활을 자초한다든가.

한 마디로 자신의 감정의 불안함이나 불편, 두려움을 대처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렇게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고 보면 잠깐은 속 편하고 큰 문제가 없어 보일 수 있지만 그 시간 중에도 그 사람의 대인관계는 병들어가고 있다.


실제로 부딪쳐보거나 겪어보면 큰일이 아닌데도 내 머릿속에만 맴돌고 있을 때는 작은 일이나 만남도 그저 두렵고 껄끄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난 이런 경험으로 힘들었던 분들이 있다면 아래와 같이 행동해 보시라 권하고 싶다.


막연한 두려움을 건강하게 마주하는 방법

1.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 내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한 그 일이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 결과 말고도 수많은 다른 결과들이 나올 수 있다. 그러니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해 보자.


2. 현실적인 예상과 결과를 적어보자.

- 터무니없는 결과(e.g.치과치료를 받다 이를 다 뽑는 상황이 생긴다. 치료가 너무 심각하게 아파 기절한다.) 대신 현실적으로 내게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에 대해 생각하고 그 결과에 따른 대피책을 마련해 둔다면 내가 마주할 그 상황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질 것이다.


3. 장기로 가져갈수록 고통이 '만성화'됨을 기억하자.

- 회피는 잠시나마 부정적인 감정을 잊게 해 준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한 감정과 고통이 '강화'되거나 '만성화'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조금씩이라도 현실과 부딪쳐 얼른 그 불편함을 떨쳐내는 편이 훨씬 내게 도움이 됨을 기억하자.


4. 내게 '보상'을 해주자.

- 실제로 난 9개월의 치과진료를 끝마치는 날에 맞춰 아주 비싸고 맛있는 한정식집을 예약해 내게 보상을 해준 기억이 있다.

- 지금의 괴로움과 고통이 나를 힘들게 하지만 그것이 마주하고 끝마쳤을 때 심적으로 고생한 나에게 작은 '보상'을 해준다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훨씬 나아지고 용기가 생겨난다.


치과에서 배운 인생의 진리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치과에 가는 게 두렵고 또 언제 내 치아가 난도질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걱정이 앞선다.

그래도 예전처럼 무작정 모른 척, 아닌 척하지 않고 그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매일 철저한 양치와 치실, 가글을 해주는데 이는 비단 치아관리뿐 아니라 우리의 삶 역시 그런 것 같다.


회피 대신 아주 천천히 그렇지만 제대로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현실적인 사고로 차근차근 처리해나가다 보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방향으로 내게 닥친 인간관계, 어려움, 고통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출처] 베르세르크 단죄편 로스트 칠드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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