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 소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환 Dec 22. 2019

배틀그라운드

전장의 한 복판에서

이 책의 부제는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다. 낙태죄, 성, 재생산을 주제로 여러 저자가 기고한 글의 모음집 형식으로 2018년 ‘성과 재생산 포럼’에서 출간했다. 공저자들은 모두 페미니즘, 장애인의 성과 인권, 성소수자 등 예민하고 무거운 주제로 일선에서 사회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분들이다. 


낙태, 동성애, 대리 출산, 장애인 등의 주제는 대학생 정치 토론 클럽의 단골 주제이며, 내 경우 종종 사내 어학당 수업에서도 토론 주제로 다뤄보았다. 그러나 과거 내가 했던 그 어떤 토론에서도, 이 책을 읽으면서 마주한 묵직함을 경험하진 못했다. 그만큼 끝까지 읽어 나가기 어려운 책이었다…


내가 이 책을 읽어 나가기 어려웠던 이유는 역시, 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약간은 호의에 가까운 태도를 가지고 있고, 불쾌감이 들 때에도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다시 한번 생각하고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페미니즘뿐 아니라 모든 종교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이다. 이런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은 아마도 나이를 먹어가며, 어렸을 때 사로잡혔던 유토피아적 세계관 같은 것이 성공한 전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세상이 내 뜻대로 잘 안 살아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적 회의주의와 불확실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추게 되면서 였을 것이다. 


물론 페미니스트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나의 대답은 달라질 수도 있다. 인지과학자이자 진화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한 세기 혹은 수 세기 전에 비하면 21세기 문명국가에 사는 사람은 거의 모두 페미니스트로 분류될 수 있다고 적었다…


어쨌거나 나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인 의미로 지칭하는 의미에서의 페미니스트는 아닌 것 같다. 때문에 이 책의 저자들이 전제하는 개념들, 그 위에서 전개하는 모든 논리에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때로 지나치게 공격적이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문장, 논리의 비약은 애써 꾹꾹 눌러 참으며 읽어 나갔다. 재미있는 점은, 저자들의 논리 전개에는 많은 부분 동의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결론에는 대체로 동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겁게 책을 읽어 나가며 경험했던 내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며 독후감을 적어본다.



1. 낙태죄


형법은 국가가 시민에게 폭력을 행사할 근거와 기준을 기술한다. 이를테면 살인, 강간 같은 짓을 저지른 사람에게 국가는 공권력을 행사해 잡아 가두고 노역을 시키고 심지어 생명을 빼앗기까지 한다. 낙태죄가 형법에 속한다는 것은, 낙태를 한 시민에 대해 국가가 죄인으로 취급하고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얘기가 된다. 낙태죄 폐지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이게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낙태죄가 헌법적 권리, 즉 모든 법에 선행하는 민주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냐를 두고 많은 공방이 있었다. 임산부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 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에 대한 해석의 싸움이다. 읽어봐도 어려운 법리적 해석이 잔뜩이지만, 내 생각에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면 ‘임산부의 뱃속에 있는 태아를 사람으로 볼 것이냐 아니냐’에 대한 해석에 달린 것 같다. 태아를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임신 중지에는 영아 살해와 같은 법리를 적용할 수 있다.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면, 임신 중지는 맹장 수술과 다를 바가 없다. 사실 태아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사람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 가운데 어딘가에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 모호함 때문에 법리적 해석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이 모호함이 해소되는 시점은 태아가 산모의 자궁 밖으로 나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으로, 이때부터 태아는 법적으로 사람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그전까지는 흰색도 아니고 검은색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의 회색이다. 이 모호한 연장선 상의 어딘가에 선을 그어 ‘여기서부터는 사람이다`라고 정의하고 그 위에서 논증을 전개하는 건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기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헛소리에 불과한 얘기가 되어버릴 테니까. 사실 그런 작위적인 분류는 진실과도 거리가 멀다…


차라리 공리주의의 논거를 빌려와서, 이렇게 주장하는 편이 좀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싶다. 태아가 세상에 나온 뒤 스스로 자립하기 전까지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무한에 가까운 헌신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머니가 태아를 낳지 않으려는 선택을 하는 상황이라면, 상당히 높은 확률로 그 태아의 출생 후 양육 환경이 좋지 않을 것이다. 또한 불행한 사람의 삶은 그 하나로도 매우 슬픈 일이지만, 그 불행을 타인과 사회에 전가할 가능성도 높다(이건 빈곤과 범죄와의 상관관계에 대한 통계 수치로도 증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불행할 가능성이 높은 한 사람의 삶을 이 세상에 내어놓을 것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적일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효용을 저해하는 행위다. 이런 행위를 강요하는 형법은 악법이므로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2. 장애인 출산


낙태죄보다 훨씬 논쟁적인 주제라고 생각한다. 만약 출산을 개인의 ‘재생산할 권리’라고 해석한다면 장애인 출산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위헌이다. 만약 출산을 ‘권리’ 뿐이 아닌 ‘공익’으로 해석한다면, 국가는 유전적 결함이 있는 개인이 출생하지 않도록 개입할 근거를 주장하게 된다(이 대목에서 저자들은 국가의 개입을 ‘우생학’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나는 조금 다른 논리를 신중하게 제안해보고자 한다. ‘출산이 개인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오만이 아닐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해보겠다.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출생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 모든 개인에게 자신의 출생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부모라는 사람들이 권리라고 주장하는 행동을 한 결과로, 자신에게 부여되는 무거운 의무다. 부모들은 과연, 자신의 권리로 태어나는 사람에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이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라고 강변할 자신이 있는가? 지옥을 보여주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최소한, 자신의 삶보다 나은 삶을 누려가게 할 최소한의 토대를 제공해줄 자신이 있는가? 국가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보장도 해주지 않는다. 만약 부모가 세상살이에서 유의미한 불이익을 얻을 만한 충분한 유전적 결손이 있고, 그 결함이 높은 확률로 자손에게 전이될 수 있다면, 그 ‘부모의 자식 낳을 권리’는 ‘자식의 출생해야만 하는 의무’를 능가할 수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3. 대리 임신과 출산


매우 어려운 주제다. 상업적 대리 임신 시장은 산모의 자궁을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거래하는 시장이다. 대리 임신을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주로 선진국 부유층)은 저소득 국가의 빈민층 여성(인도, 태국 등)의 자궁을 구매한다. 이런 행위를 합법이나 위법으로 분류하는 기준은 국가마다 다르다. 모든 국가의 법은 헌법 위에 쌓아 올려져 있고, 헌법의 기반은 윤리와 도덕이다. 어쩌면 대리 임신에 대한 법 해석이 국가마다 다른 것이 이 주제의 도덕적 쟁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 주제에 대한 도덕 논쟁을 벌인다면, 대리 임신을 찬성하는 쪽의 도덕적 기반은 매우 취약하다. 사실상 성매매에 적용되는 모든 비판이 그대로 적용된다. 자신의 신체 일부를 수십 분 동안 빌려주는 대가로 수십 만원의 돈을 받는 행위를 부당하다고 한다면, 약 십 개월 동안 대여해주는 대가로 수천 만원의 돈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할 근거가 없지 않은가? 구매자의 동기에 대해서도, 자신의 유전자 일부를 공유할 아기를 소유하고 싶은 개인적 동기가, 성적 쾌락을 추구하려는 동기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할 근거는 무엇인가? 한편 성매매 여성들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신의 몸을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빈곤이라는 사회 구조적 요인에 의해 성매매 시장에 내몰린다고 주장하는 논리는, 대리 임신 시장에서 자궁을 판매하는 여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가?


개인적으로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일단 그렇게 ‘자신의 아기’를 가지고 싶은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어느 무책임한 부모가 성적 쾌락 추구와 재생산의 권리를 행사한 결과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옥을 맛보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이를 정 가지고 싶다면 자기 유전자의 일부를 공유하는 아기가 아니라 이런 불행한 아이들을 거두어서 돌보는 생각을 해보는 게 어떨까 싶다. 어차피 자신의 유전자도 따지고 보면 온전히 자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진화심리학의 관점으로 보면 우린 모두 수백만 년의 자연 선택과 성 선택의 결과로 살아남은 유전자들의 운반 기계일 뿐이다. 출생이 내 선택이 아니었듯 내가 어떤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도 내 선택과 무관하다. 자기 것도 아닌 것을 자기 것이라 착각한 채 그저 한 번 흘러가는 찰나의 생을 살고 있을 뿐인 것이다...



4. 퀴어의 재생산


모든 주제가 논쟁적인 이 책에서도, 정말 끝판에 가 있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만약 재생산의 권리가 개인의 기본권이고 이 권리가 다른 모든 것에 선행한다는 논리를 전개한다면, FTM(Female to Male)이 자신의 여성 성기를 유지한 채 임신을 하겠다고 해도 막을 논거가 없다. 다만 현실은, 논리의 문제를 떠나서 한국의 정서와 법 체계가 아직 퀴어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소심한 입장에 있기에, 이 주제가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으려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앞서의 논지와 마찬가지로, 부모의 권리보다는 그 권리로 인해 부과되는 아기의 의무 –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삶이라는 막중함을 살아내야만 하는 – 를 좀 더 세심하게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퀴어 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직 한국 사회는 퀴어 부모 아래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호의적으로 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아이를 낳는 것은 엄청난 용기와 막중한 책무를 필요로 할 것이고,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세상이라는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부디 신중한 선택을 하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내 삶이 아니니 그 또한 함부로 말은 못 할 것 같다.


그냥 나라면 안 낳을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