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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환 Jun 10. 2020

사고의 본질

Surfaces and Essences

이 책은 더글라스 호프스태터와 에마뉴엘 상데의 공저로, 영어와 프랑스어본으로 출간되었다. 감수를 맡은 최재천 교수에 따르면, 호프스태터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혹은 '살아있는 박학다식 만능인'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니는 사람이라고 한다. 호프스태터는 프랑스 발달심리학자 상데의 책을 읽고 그의 인간 인지에 대한 관점이 자신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몇 년 뒤 상데에게 그의 책을 자신이 영어로 번역하고 싶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 제안은 곧 둘이 의기투합해 '유추가 인간 사고의 본질 '라는 사실을 소개하는 책을 공저하는 것으로 바뀐다. 이 책은 두 사람이 수년간 이메일과 전화, 그리고 서로가 사는 도시를 방문하며 생각을 나누며 발전시켜 유기체처럼 진화한 결과라고 한다. 원서는 2013년, 한국어 초판은 2017년 발간되었다.


책은 총 768페이지로 적지 않은 분량이다. 이는 저자들이 '유추가 사고의 본질'이라는 주제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간명한 논증을 사용하지 않고, 책의 주제와 일관되게 다양한 유추의 사례를 풍부하게 언급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영어나 프랑스어에 능숙한 사람이라면 예시로 든 각 언어의 유추 표현 사례에서도 음미할 수 있는 포인트가 많이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나는 어려운 외국어 구절은 애써 이해하려 하지 않고 속독으로 스킵했다. 사실 저자들의 주장에서 핵심만 뽑아서 요약하면 다음의 몇 줄로도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1. 인간 사고의 본질은 유추다. 유추의 결과 우리는 개념들을 범주화해 인식하고 기억하고 인출한다.

2. 유추는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쉴 새 없이 일어난다.

3. 유추는 여러 단계로 추상화된 개념들의 층위를 오가는 범주 간 비약을 통해 일어난다.

4. 유추를 처음으로 연구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정형화된 형식 논리(연역, 귀납, 가추 등)가 우월하고 유추는 열등하다는 고정관념이 서구 사상에 깊숙이 자리 잡아왔지만, 실상은 그 반대에 가깝다. 즉 유추는 우리의 모든 사고 과정 순간마다 불쑥 난입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한다.

5. 유추는 타인과의 의사소통에서 매우 효과적인 기능을 하는 한편, 전쟁과 같은 중대한 의사결정의 순간에서도 사고의 관점을 지배했고, 중대한 과학적 발견에서 사고의 도약을 할 때에도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 서술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위 내용만 읽어봐서는 유추가 그렇게 대단한 역할을 하는지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역시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얼마간이라도 읽어봐야 확 와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들이 수많은 유추 사례를 인용하는 동시에 책의 기술에도 유추적 전개를 녹여낸 것엔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다만 분량이 절반 정도만 되었다면 전달이 더 잘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책을 읽으며 한 생각들을 정리해 적어본다. 이 책의 서술이 논증이 아닌 풍부한 유추로 가득 차 있듯, 나 또한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서술한 메모들을 이어 붙여 서술했다.



1. 개인적 소회


학생 시절 전공 필수로 들어야 했던 인지심리학 수업은 나에게 지적 자극보다는 지루함이 더 많은 분야로 다가왔다. 그래도 십여 년 전 수업에서 기억에 어렴풋이 남았던 주제 중 하나가 '범주화'였는데, 역시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범주화된 기억을 인출할 때 전형(prototype)과 대표적 사례(exemplar) 중 어느 쪽이 더 반응 속도가 빠른 자극인가에 대한 연구가 있었던 것, 그리고 그걸 보며 '이런 연구를 하는 것에 재미를 느껴야 인지심리학자가 될 수 있는 것이구나'라고 했던 생각 정도가 기억난다.


이 책은 유추와 범주화라는 주제를 매우 신선한 시각으로 제시한다. 유추가 사고의 본질이라는 저자들의 주장이 학계에서 확고하게 정설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닐 터이지만, 이 주장을 지지하는 증거 또한 무시 못할 만큼 쌓여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로서의 성취나 인정을 떠나 대중서로서 이 책이 독자들에게 가져다주는 즐거움은 충분한 듯하다. 역시 분량만 조금 적었더라면 더 좋았을걸 하는 생각도 해본다.



2. 천재 과학자처럼 사고하게 해주는 교육이란


1장에서 갈릴레오가 목성과 그 둘레를 공전하는 위성들의 존재를 관측하고, 여기에서 지구와 달을 유추해낸 사실을 인용한다. 이 대목에서 저자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문장이 인상적이어서 인용해본다.


"우주의 작은 대상들이 더 큰 대상의 주위를 돈다는 가설을 통해 갈릴레오가 상상한 것은 하나 이상의 대상이 중심적인 대상 주위를 도는, 친숙한 수많은 지상의 상황을 전대미문의 규모로 복제한 것이었다. 갈릴레오의 천재성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진지하게 참고하여, 하늘이 인간의 삶을 더 즐겁게 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예쁜 이차원적 벽화가 아니라 인류와는 전적으로 별개의 것이고, 지구에서 자신이 아는 장소와 비슷하지만 훨씬 광활하며, 따라서 미지의 규모를 지닌 대상이 운행할 수 있는 진정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냈다는 것이다...
... 갈릴레오의 이 심오한 시각이 아주 작은 장난감을 (다른 요소들은 너무 커서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트럭이라는 범주의 요소로 보는 아이의 시각과 다를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두 경우 모두 아주 큰 대상으로 상상된 아주 작은 대상이 있고, 인식하는 사람은 친숙하지 않은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친숙한 대상을 활용한다는 사실 말이다."


갈릴레오의 유추와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툭툭 내뱉는 유추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주장이다. 천재들은 아이들처럼 상상력이 자유롭다는 말과도 상통하는 얘기다.


한편 이 대목에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흔히 아이들이 순수하다고 하는 표현은 관습적 사고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개념화와 범주화를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대한 과학자들은 기존의 관습을 깨고 새로운 도약을 이뤄내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끌어내기까지 한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기존의 개념적 틀을 학습하지 않은 상태에서 생각을 전개하지만, 후자의 경우 기존의 개념적 틀을 다 학습한 위에서 새로운 사고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아이들이 보이는 순수함보다 위대한 과학자의 사고력은 훨씬 희소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아이들이 갈릴레오처럼 생각할 수 있게 도와주는 교육은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기존의 틀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틀을 넘어 새로운 파격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얻게 해주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꼭 모든 사람이 이런 능력을 갖출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삶의 많은 단면은 익숙함과 반복이 아니면 불편하고 당황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가령 음식을 예로 들면,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기대하는 짜장면의 맛이 있다. 만약 모든 중식 셰프가 매일 파격적인 레시피를 실험하면 사람들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꼭 모두가 천재를 지향해야 한다는 교육관은 어떤 강박과도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천재로 태어나건 범인으로 태어나건 다 각자의 자리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게, 더 가치 있는 생각이지 않을까.



3. 여행, 수용 가능한 낯설음이 주는 즐거움


3장에서 유추의 사례로 낯선 여행지의 경험을 소개한다. 문화와 관습이 다른 동네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한복판에 서 있을 때, 익숙한 일상의 기억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자들은 이 사례를 통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익숙한 기억들로부터 의식하지도 않은 채 얼마나 많은 유추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이 대목에서, 여행과 낯설음이라는 소재로부터 다른 생각들로 유추가 일어나 메모를 해뒀다. 여행을 가서 느끼는 낯설음은 내가 평소 익숙한 유추가 통하지 않음에서 오는 것이다. 한편 여행에서 느끼는 설레임의 어떤 부분은, 이와 같이 수용 가능하고 위협적이지 않은 불확실성이 선사하는 즐거움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이 불확실성이 수용 가능한 선을 넘어가면 오지여행이나 표류기가 될 것이고. 그 수용 가능한 정도는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난 과거에는 꽤 역치가 높은 수준이었지만, 이제 나이를 먹으며 조금씩 낮아지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도 든다.



4. 범주와 도식


4장에서 추상화와 범주 간 이월을 설명하며, 외모가 전혀 다른 Emma라는 동명이인에 대해 '쟤는 Emma 답게 생기지 않았다'라고 하는 사례를 소개한다. 이 대목에서 범주와 도식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 메모를 해뒀다. 범주(category)는 개념의 덩어리, 다시 말해 도식(schema)과 같다. 도식 기반 추론은 식역 하에서 매우 신속하게 촉발되어 생각의 방향을 끌고 간다. 진화적 관점에서 이런 마음 과정이 존재하는 이유는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단축키는 대체로 효율적이지만 항상 맞지는 않는다. 때문에 이 예시와 같은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5. 마우스, 상당한 정신적 도약의 결실


개인적으로 꽤나 재미있게 읽은 대목이 4장 중 '마우스와 인간' 절이다. 여기서 저자들은 '마우스를 상당한 정신적 도약의 결실'이라고 표현했다. 재미있는 상상력을 인상적으로 표현한 구절이라 생각해 인용해본다.


"마우스는 인체의 사지에 해당하는 전자적 대용물이다. 즉 마술적 능력을 지닌 인공 기관이다. 우리가 가진 사지는 주위를 둘러싼 3차원적 물리 세계에서 행동하게 해 주지만 마우스는 컴퓨터 화면에 드러나는 2차원적 가상 세계와의 인터페이스를 구성한다. 흰 토끼를 따라 토끼 굴로 들어갔다가 이상한 나라를 발견한 앨리스처럼 우리는 마우스를 통해 비물질적 세계로 가는 경로를 확보한다. 마우스가 우리의 토끼인 셈이다...
... 마우스는 상당한 정신적 도약의 결실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물질적이라는 범주와 비물질적이라는 범주 사이에는 이을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 물리적 대상이라는 범주보다 훨씬 폭넓은 조작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새로운 범주는 마우스가 고안되면서 생겨났다. 이 새로운 범주는 우리가 주위를 둘러싼 세상과 관계하는 방식에 대한 과거의 추정을 무너뜨리고 존재론적 범주, 즉 우리가 세상을 분할할 때  도움을 얻는 일련의 근본적 범주를 크게 바꾸었다."


마우스에게 물질적 세계와 비물질적 세계를 중재하는 창구라는 엄청난 지위를 부여하는 놀라운 상상력이라니. 바로 이 지점에서 데카르트가 둘 사이의 창구라고 생각했던 송과선이 생각났다. 이어서 르 두가 초청받았던 교황청 주재의 학술대회가 떠올랐다 - 비물질적 신이 물질적 마음과 어떻게 소통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어렵다는 점에서, 과학과 소통하고 싶은 신학계가 맞닥뜨려야 하는 근본적 딜레마. 이 사례들을 연이어 떠올린 것을 보면 내 마음속에도 연상과 과감한 유추들이 쉴 새 없이 샘솟아 나오고 있는 듯하다.



6. 형식논리  vs 유추논리


5장에서 또 인상적인 문장으로 '논리와 강력한 유추가 맞붙으면 유추논리(analogic)가 이긴다'라는 대목이 있었다. 이 대목에서, 일상에서 늘상 마주치는 정치인들의 수사를 생각해봤다.


종종 보수 정치인들의 발언을 들여다보면 일반적으로 형식논리는 매우 취약한 반면, 놀라울 만치 효과적인 유추를 구사한다. 그것도 아주 적절한 도덕 감정을 자극하면서. 대체로 형식논리로 세상을 이해하는 경향이 강한 진보 성향 시민들은 이들의 논리력이 저급한 수준이라고 대놓고 폄하하지만, 만약 우리의 사고 체계를 지배하는 더 근본적인 기제가 형식논리가 아닌 유추라고 한다면, 진보주의자들은 크게 오판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들의 주장을 믿는다면 그런 결론에 닿는다.


그러나 투표소에 나오는 사람의 표는 형식 논리에 설득당한 사람이건, 유추와 감정에 설득당한 사람이건 동등한 한 표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형식 논리 또한 인간의 합리화하는 본성이 시스템 2를 동원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그러니 진보 진영 정치인들이 지지층을 더 포섭하기 위해서는 코끼리에게 말을 는 방법을 익혀야 할 것이고, 유추논리는 그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낙연 전 총리의 예전 국회 대정부 질문 문답을 보면 이런 화술에 꽤 능한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능력이 차기 대권주자까지 성장하는데도 꽤나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7. 프로이트와 다윈, 아직도 검증되지 못한 대담한 사고의 도약.


5장에서 일상적 말실수를 언급하며 여러 유추들의 범주화가 경합하는 가운데 튀어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이 대목의 서두에서 이 현상에 처음 주목해 이론화한 사람이 프로이트였다는 사실도 서술한다. 최근 읽는 책들에서 프로이트의 이름을 이따금씩 계속 마주치는 것을 보니, 역시 세상사에 끼친 그의 영향력이 지대했음을 새삼 실감한다.


프로이트가 이드, 에고, 슈퍼 에고의 팽팽한 긴장 관계라고 설명한 말실수를 이 책의 언어로 바꾸면, 말실수란 식역 하에서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범주들이 추상화 층위를 넘나들며 개념의 이월을 빚어내고, 그중 일부가 의도치 않게 말에 섞여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생성되는 언어의 대부분은 우리의 상식과 관습 체계 안에 부합하는 것이지만, 그중 관습과 맞지 않거나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일부를 우리는 말실수라고 부른다.


말실수라는 현상으로부터 프로이트는 의식 밑에 있는 무언가를 포착해 개념화하려 했고, 도덕과 성을 덧입혀 호기심 동하는 스토리를 만들어 냈다. 그 스토리는 당대 과학의 방법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는 바로 그 한계를 절감했기에 더욱 과감하게 자신의 상상력을 밀고 나갔다. 그 결과 프로이트는 과학계에서는 멀어졌고, 과학계 밖에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자연계의 현상을 과학이라는 도구로 분석한 갈릴레오, 아인슈타인은 당대의 관습적 사고를 파격적으로 허물어 사고의 도약을 했고, 그 결과가 맞았음을 경험적으로 입증했다. 한편 인간의 무의식에 대해 대담한 지적 도약을 했던 프로이트, 인간 종이 동물의 연장선이며 미래에 심리학은 인간과 동물의 마음을 연속선에서 통합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대담한 주장을 한 찰스 다윈이 있었다. 갈릴레오, 아인슈타인과 달리 프로이트, 다윈(진화심리학에 한하여)의 시도는 아직 확고한 경험 법칙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이들이 다룬 현상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라는,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화수분 같은 현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경험적 증거에 기반해 설명해나가는 일은 매우 지난한 작업이다. 그러므로 아마 가까운 미래에도 이들의 예언이 확고한 경험 법칙으로 증명될 가능성은 희박할 것이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돌 하나씩 얹어가다 보면 조금씩 더 나은 이해로 진보해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보는 수밖에 없다.



8. 인공지능,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


6장에서 저자들은 당대의 기계번역이 사용하는 방법이 인간이 번역 과정에서 사용하는 세련되고 정교한 유추에 비견하면 조악한 수준인 것으로 평가절하한다. 당시(이 책은 2013년 원서 초판이 발행)에 사전 기반 번역의 한계를 뛰어넘을 방법으로 제시된 통계적 번역이라는 개념을 언급하기는 하나, 이 역시 시를 번역하는 작업의 복잡성에 비교할 바가 못 된다고 서술했다. 2020년 현재 구글의 번역기는 그야말로 괄목상대할 수준으로 발전해 이제는 스마트폰과 인터넷만 있다면 전 세계 어디라도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을 것 같은 수준이 되었지만, 역시 시를 번역하는 수준에 비견할 바는 못 된다.


종종 사람들은 강 인공지능 대 약 인공지능의 구도로 언쟁을 한다. 강 인공지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기계가 인간처럼 사고하고 인간의 모든 일을 대체할 수 있을 것처럼 주장한다. 약 인공지능 정도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은 기계가 아무리 잘해봐야 인간이 수행하는 작업의 고차원적 본질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저 흉내내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한다. 내 생각에 이건 그닥 생산적인 논쟁은 아닌 것 같다.


번역이라는 문제로 생각을 해보자. 숙련된 고급 번역가가 할 수 있는 수준의 번역을 하려면 매우 숙련된 유추 능력들이 과감하면서도 절제력 있게 구사되어야 한다. 세련된 유추를 통해 도달한 창의적 절충, 이걸 하려면 통계적 번역 기법이 얼마나 더 진보해야 할까? 혹은 얼마나 더 많은 사례의 데이터를 학습해야 할까? 한편으로는 언어 자체가 그 시대의 사람과 문화와 함께 항상 변화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계번역이 높은 수준으로 갈수록 한 단계를 도약하는  난이도도 지수로 증가할 것이다.


그럼 기계번역이 인간의 수준에 근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무쓸모한 것이 될까? 그렇지 않다.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기계번역이나 인공지능의 능력을 폄하할 실용적 이유는 전혀 없다. 초벌 번역을 꽤 그럴싸한 수준으로 빠르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노력을 엄청나게 덜어주지 않는가. 앞으로는 인공지능의 능력이라는 자원을 자신의 생산성 향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승자가 될 것이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태될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미래는 기계와 협업할 수 있는 인간, 그 인간을 효과적으로 보조할 수 있는 기계가 공진화하는 방향으로 선택압이 작용할 것이라 생각한다.



9. 엄밀성과 논리적 완결성은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


8장 '세상을 뒤흔든 유추'에서 "세간의 상식과 달리 수학자들의 사고는 엄밀성, 논리적 완결성으로 쌓아 올려진 완벽에 가까운 그 무엇이 아니다"라고 서술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수학자들의 사고에서도 유추는 레야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며, 군론과 같은 주제는 유추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이 대목에서 지난번 트레바리 이벤트에서 김민형 교수님과 주고받은 짧은 문답이 생각났다. 당시 내가 했던 질문이 바로 정확히 이 주제였기 때문이다. 당시 군론과 구조주의를 주제로 한 강연이 끝나고 나는 '수학은 난공불락과 같은 논리적 완결성의 결정체라는 상식을 가졌는데, 군론과 구조주의 설명을 들으니 이런 편견이 깨져나가는 것 같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인간의 의식으로 어떤 현상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지가 의문이 든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라고 질문을 드렸다.


김민형 교수님은 '개미가 소수의 존재를 알까요? 아마 모르겠죠. 하지만 소수는 존재하지 않나요?'라는 반문으로 내 질문에 대답하셨다. 참 멋진 대답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 책의 저자들의 표현대로라면, 이 대답 자체가 바로 범주 이월을 이용한 유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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