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냐는 나와 제일 친한 프랑스 친구이다. 프랑스 유학시절, 화려하지만 외롭고 피곤했던 파리에서 언제나 함께 동고동락했던 그녀와 만난 건 벌써 14년 전 일이다.
파리의 한편에 위치했던 한국문화원 지하의 낡고 작은 도서관(지금은 샹젤리제 거리의 아주 멋진 건물로 이사했다.)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던 그녀를 발견한 나는 다짜고짜 그녀에게 다가가 같이 언어교환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 당시 나는 초급 프랑스어를 겨우 끝낸 정도였고, 그녀 또한 나랑 비슷한 처지로 한국어를 더듬더듬할 수 있었고, 한국사람을 만난 건 한국어 선생님 이외에는 내가 처음이었다. 우리는 서로 말은 제대로 안 통했지만, 서로 그냥 같이 있는 것이 너무 좋았었다. 국적을 떠나 서로가 그냥 잘 맞았다고 할까.
그때를 생각하면 뭐가 그렇게 서로 재밌고 좋았는지 도냐랑 언어 교환한답시고 매주 1-2번 만나서 파리의 맥도널드나 작은 카페에서 만나서 시답지 않은 이야기에 서로 계속 키득대던 것만 생각난다. 도냐는 늘 모든 일에 열정적이고 남을 배려해주는 따뜻한 친구다. 내가 석사를 시작하기 위해 교수와 면접을 봐야 하는데 마음이 콩알만 해진 내게 할 수 있다고 얼마나 힘을 북돋아주던지. 다른 문화에 호기심도 많은 그녀는 지금은 태국어를 새롭게 배우고 있다.
사실 그녀는 나보다 5살 어리지만, 나이에 상관없이 ‘친구’가 되는 프랑스 문화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진짜 속 얘기까지 다 하는 사이가 되었고, 지금까지 그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 그녀가 가끔 나에게 실수로 한국어로 ‘너’라고 지칭할 땐 ‘언니’라고 고치며 한국어는 정말 나이에 따라 관계 설정이 달라짐을 느꼈지만. -
도냐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나누고 오랜만에 그녀와 다시 옛날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한국에 대한 기억과 추억들을 오랜만에 이야기하는 내내 얼마나 행복해하던지. 한국과의 추억들에 젖어 설레어하는 얼굴에 나까지 행복해졌다.
도냐는 프랑스의 한류의 시작과 함께한 프랑스인이다. 처음 들은 한국 노래는 슈퍼주니어, 처음 본 드라마는 풀하우스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 노래는 부활의 ‘희야’,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는 ‘선덕여왕’이다. 우리는 ‘커피프린스’를 같이보고 너무 신나 했으며 새로 나온 어반자카파 노래를 들어보라고 권해준 것도 오히려 도냐였다.
한국음식도 이젠 완전 프로인데 깍두기에 잡채, 연근조림, 한국식 치킨까지 웬만한 한국요리는 뚝딱 해낸다.
영국에서 도냐가 일할 때 놀러 간 적이 있는데, 그때 그녀가 끓여준 양고기 순두부찌개(소고기가 없어서 양고기로 끓였다고 )의 그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참고로 그녀는 자신의 전공 회계와 한국어를 살려 프랑스와 영국에 있는 한국 기업의 재무팀에서 6년을 일했다.
그녀가 한국어를 배운 계기는 정말 특별하다. 2007년 BNF(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프랑스 국립도서관, 파리 )에서 아시아 책 코너에서 책들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윤동주의 시집(불어 번역본)을 발견했다고 했다. 하루키 같은 일본 소설만 보다 한국 책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윤동주의 시는 ‘내일은 없다’.
내일은 없다 - 어린 마음이 물은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아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동무여!
내일은 없나니
······
<윤동주, 1934>
“‘내일은 없다’는 그 말이 내 머리를 ‘탕’하고 때리는 느낌이었어. 그 당시 내가 던지고 있던 삶에 대한 질문들에 대해 해답을 찾았다고 할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늘 미루고만 있었는데 내가 미루던 그 ‘내일’은 없구나. 물론 나중에 윤동주가 왜 내일은 없다고 말했는지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 역사를 공부하고 더욱더 깊이 있게 이 시를 이해할 수 있었던 거 같아.”
그렇게 그녀는 윤동주의 시들에 꽂히기 시작하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한국어 공부까지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그녀는 특히 한국어로 ‘별 헤는 밤’을 다시 읽었을 때 프랑스어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멜로디가 느껴졌다고 했다. 윤동주를 사랑해서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니. 정말이지 사랑스럽지 않은가.
특히 윤동주의 삶과 한국의 구체적인 역사를 알고 보니, ’ 내일’ 없이 한국의 독립과 자유에 대해 깊은 고뇌를 해야 했던 청년 윤동주의 고통이 가슴 깊이 느껴졌다고 했다. 한국 여행을 가자마자 제일 먼저 간 곳도 윤동주 문학관과 그가 다녔던 연세대학교였단다. 그가 걸었을 연세대 교정을 걸으며 사색에 잠겨도 보고, 그의 문학세계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전시관이 너무 좋았다고 했다. 한국에 왔을 때 같이 한정식을 대접하고, 홍대 전통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윤동주 문학관 이야기를 얼마나 신나게 하던지. 한국에 온 기념으로 ‘시’를 사랑하는 그녀에게 ‘백석’의 시집을 선물로 주었었다.
그녀는 목포여행도 혼자 갔는데 어르신들이 너무 예뻐해 주셨단다.
“ 식당에서 어르신들이 영어로 제게 말을 거시길래 한국어로 대답했더니, 너무 좋아하시면서 ‘밥은 혼자 먹는 거 아냐. 우리랑 같이 먹자.”라고 하셔서 그분들이랑 같이 밥을 먹었어. 또 목포의 작은 마을을 구경하다가 김장하시는 할머님에게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는데, 바로 나보고 얼른 와서 김치 맛보라고 주시고. 너무 따뜻하고 좋았어”
한국 회사에서 일도 해봤기 때문에 그녀는 한국문화도 잘 안다.
“한국 회사에서 일할 때 재미있었어. 하지만 개인적인 시간이 정말 없었어. 주말에도 일하고. 제일 오래 일했던 건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새고 그다음 날 새벽 5시까지 일한 적도 있고. 신년 첫날 자정을 회사 사람들이랑 사무실에서 맞이한 적도 있고.”
프랑스 회사랑 다른 점도 많아서 고생했을 텐데 버텨준 도냐가 대견했다. 그래도 한국 회사에서 배운 점이 많단다.
“한국 회사는 뭔가 ‘하자’ 했을 때, 같이 이뤄낼 수 있다는 그 느낌, ‘할 수 있다’ 그 분위기가 주는 힘이 있어. 내가 일한 결과를 빨리 볼 수 있어서 힘들지만 보람이 있었어. 하지만 프랑스 회사는 같은 회사 동료들끼리도 컴플레인을 많이 하고, 부서끼리 업무 처리하려면 사사건건 설득시켜야 하고, 일이 너무 천천히 진행되어서 이제는 좀 답답하기도 해. 하지만 내 업무만 생각하면 되고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까 편하긴 하지.”
한국사람들하고 소통할 때 프랑스 사람들이랑 제일 다른 점이 뭘까라고 물었더니 핵심을 짚었다.
“프랑스에서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어도 하고 싶은 이야기, 자신의 의견을 다 이야기해. 워낙 서로 의견을 다 말하는 문화가 익숙하기에 그렇게 서로 상처받지도 않고 서로를 감정적으로 싫어하진 않아. ‘너랑 나랑은 생각이 다를 수 있어, 알겠어’하는 문화가 있거든. "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상대방을 굉장히 많이 배려해서 의견이 달라도 말을 하지 않거나, 듣기 좋은 말을 예의상 더 많이 하는 거 같아. 예를 들어 예의상 ‘밥 먹자’ 말하는 거랑, 아이를 봤을 때 안 이뻐도 ‘귀엽다’라고 말하는 게 신기했어. 프랑스 사람들은 밥 먹자 하면 진짜 먹는 거고, 아이라도 외모에 대해 말하진 않아. 한국사람들은 보통 외모에 대해 “살 빠졌네, 더 예뻐졌네” 이런 칭찬을 하며 인사를 주고받는데, 나는 이게 충격이었어.( 나도 도냐 한 테 했는데! ) 프랑스 사람들은 아무리 칭찬이라도 외모에 대해 언급 자체를 거의 하지 않거든”
사실 이 이야기를 도냐가 했을 때, 나도 강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인들은 친할수록 더 가감 없이 바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어서 놀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도 아직도 적응이 잘 안 된다. 본인들은 괜찮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 그렇게 대놓고 말을 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사람들은 한껏 멋을 내거나 열심히 살을 뺐는데 아무 말도 안 해주면 서운할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아무 말도 안 할 수 있으니 서운해하지 마시길.)
지금 니스에서 살고 있는 그녀는 매일 한국이 그립단다. BTS광팬인 조카가 가사 번역이나 한국음식을 해달라고 맨날 부탁해서 같이 한국요리를 해 먹으며 그리움을 달랜다고.
도냐는 한국어로 시도 지었다. 도냐는 자신의 시를 옮기는 것을 흔쾌히 허락했다. 한국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내 친구 도냐의 이야기를 그냥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시도 함께 감상해주시길.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나의 호기심을 끌었다.
당신은 신비로웠기 때문에, 더 다가가고 싶었다.
당신의 귀여운 모습 뒤에, 더 많은 것들이 숨어있을 것 같았다.
당신은 내 마음에의 열쇠가 되었다
신비로운 색이 넘치는 글자들의 세계의 키였다.
당신 덕분에 역사와 이야기들이 내 안에 힘을 심어주었다.
인내로 인하여 인간의 모습을 선물 받은 곰처럼 나는 변하고 싶었다.
내일은 없다고 읽었을 때,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고 싶었다.
덕분에 나는 즐거운 추억을 쌓았고,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당신은 나의 서시, 당신은 나의 책의 첫 페이지가 되었다.
글자 하나에 추억과,
글자 하나에 사랑과,
글자 하나에 쓸쓸함과,
글자 하나에 친구와,
글자 하나에 시와,
글자 하나에 만남과,
글자 하나에 인생.
< 한글과 나, 도냐 , 2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