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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하 Nov 27. 2024

상처받지 않는 영혼

중학교 3학년 여학생반 담임을 맡고 있다. 개학하고 3월부터 씨름해 온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얼마 전 자신이 원하는 고등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더 이상 학교 다니는 것을 힘들어하지 않는다. 매일 지각을 할 뿐이다. 1년 가까이 너무 이 아이에게만 집중했었나 보다. 다른 아이가 불거져 나온다. 이제 나의 주의가 그 아이에게 간다. 그 아이의 행동이 거슬린다. 따로 불러다 이야기를 해 보았다. "그런 언행은 주위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좀 자제를 해라." 하는 데 그 아이는 자기변명만 늘어놓는다. 부모님과 통화를 해볼까 하다가 말았다. 금요일, 중학교 최종 내신 성적표를 나누어 주는 종례시간.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 아이는 나에게서 성적표를 받아 들고 욕을 하면서 들어갔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다가 그다음 주 월요일에 그 아이를 불렀다. "내가 니 욕을 듣고 많이 불편했었다." 그 아이는 자기변명을 늘어놓는다. 자기는 성적표가 아니었으면 그런 일도 없었단다. '네 죄송합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로 끝날 이야기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고 결론은 이 시간에 공부했으면 서울대 갈 텐데 시간낭비를 했단다. 가슴이 꽉 막혀온다. 내가 지도할 수 없는 아이라는 생각에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 말씀을 드렸다. 나는 그날 집에 가서 끙끙 앓았다. 그 뒤로 그 아이는 이틀 연속 조퇴를 하고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찾아뵙겠다고...


나를 찾아오신 어머니는 "우리 00이가 선생님만 보면 손, 발에 땀이 나고 배가 아프고 어지럽고 그렇데요... 손에 습진이 나서 피부가 다 벗겨졌어요. 학교 가기가 힘들데요..." 당황스럽고 황당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황당했지만 아이가 아프다니, 그것도 나 때문에 아프다니 참 마음이 아팠다. 아이가 선생님에게 지적을 받고 학교 가기 힘들다고 하니 같이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어머니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 마음에 공감이 갔다. 마음이 무겁다. 그날 밤, 밤새 우리 둘째 아이가 자다가 토를 하며 앓았다. 내가 남의 자식 아프게 해서 내 자식이 아픈 건가...라는 생각에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책을 편다. 해답을 찾아보자. 


모든 사람들이 이 방법을 택하고 있다. '네가 날 건드리면 나는 자신을 방어하겠어. 고함을 지르고 널 사과하게 만들 거야. 내 속을 건드렸다간 후회하게 만들 거야.'라고 말한다. 만약 누가 내 두려움을 건드리는 짓을 하면 당신은 그가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당신은 그가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한다. 우선 자신을 방어하고 그다음에는 자신을 감싸고 보호한다. 괴로운 느낌을 느끼지 않게,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한다.
마침내 당신은 자신이 내부의 그 덩어리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지혜로워진다. 누가 그것을 건드리는 가는 문제의 초점이 아니다. 어떤 상황이 그것을 건드리는 지도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들 대부분은 그리 지혜롭지 못하다. 실제로 우리는 그 덩어리로부터 해방되려고 하기는커녕 그것을 계속 품고 있을 핑계를 만들어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진정으로 영적 성장을 원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품고 있는 것이 곧 자신을 함정에 가두는 짓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거리서 빠져나오고 싶어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삶이 당신을 돕고자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삶은 당신의 성장을 자극해 줄 사람들과 상황들로 당신을 둘러싼다. 거기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당신이 판단할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당신이 걱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나 가슴을 기꺼이 열어 젖히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정화의 과정이 일어나는 것을 수용하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할 때 가장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은, 당신의 그것을 건드려 줄 상황들이 스스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당신의 삶에서 늘 일어나고 있었던 일이다. 다른 점은 이제 당신은 그것을 , 놓아 보낼 기회를 주는 좋은 일로 반긴다는 것이다.


그 아이의 언행에 내가 불편했던 건 그 아이의 부족한 사회성과 자기 조절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였던가...

이 일을 통해 나는 어떻게 영적성장을 이룰 수 있을까?... 내 안의 어떤 두려움을 정화시키기 위해 이런 문제가 생긴 걸까?... 그 아이한테서 나의 모습을 봤었던 걸까?... 온통 자기중심적인 아이,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아이, 다른 사람의 영역에도 끼지 않고 남이 나의 영역에도 끼지 않길 바라는 아이. 이 그림을 그렸던 아이다.

크레이머 미술치료학교 미술반 5회차 수업 - 세상의 모든 노랑

이 그림을 그렸을 때 00가 다른 아이들이 다른 사람 그림에 맞춰 그려나가는 과정을 지켜봤으면 했었다. 미술치료학교에서 이 그림에 대해 발표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미술치료학교 선생님은 그런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하셨었다. 교사라는 직업 특성상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미술 치료사로서의 역할은 그 장을 펼쳐주는 것에서 끝나야 한다고 하셨다. 그 사람을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보고 고치려고 하지 말고... 그때는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야 절실히 이해가 된다.

나는 고등학교 때 오직 대학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 누구보다도 성실히... 야자 튀고 라면 먹고 노래방 가고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잠깐 회사 생활을 할 때에도 회사 동료가 옆에서 무슨 일 때문인지 울고 있어도 내 마감이 잡힌 일을 하느라 나는 그 친구를 위로해 주지 못했다. 학교 생활에서는 우리 교무실의 화기애애한 단톡방에 잘 낄 수가 없다. 어떻게 받아쳐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아직도 그렇긴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고 내 나이가 되면 그런 나의 성격들을 조금씩 다른 사람에 맞춰나가야 함을 알고 자연스레 배우게 되는데 00도 그렇게 될 텐데, 00에게서 보이는 나의 모습이 싫었나 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선생님들처럼 "00아, 그런 아니지"하면서 웃어넘길 수 없고, 그 아이를 데려다 진지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오늘 아이를 불러다가 내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당신은 중심 잡힌 인식의 자리에 앉아 자신의 그것이 건드려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지켜보고 있는 한 당신은 거기에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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