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땐 독서
창밖에서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이 집에 십 년 넘게 살면서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소리였다. ‘풍류’라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한자로는 風流, 말 그대로 바람의 흐름을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살기 시작했다.
그렇다, 무언가를 없애면 그곳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원래 거기 있었지만, 무언가가 있음으로 해서 보이지 않았던, 혹은 보지 않으려 했던 세계가.(43쪽)
사람이든 물건이든, 받아들이기 힘든 상대를 받아들여야 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그 상대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
자세히 보면, 싫다, 싸워야 할 적이다, 하고 일방적으로 단정하던 상대에게서 조금이나마 좋은 점, 괜찮은 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아주 조금씩이라도 상대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다.(98쪽)
냉장고가 없던 시절, 음식을 보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이 한 번에 살 수 있는 양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냉장고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얼마든지’ 먹을거리를 살 수 있게 되었다. 오늘 다 먹지 않아도 되니까. 식품업계로서 이것은 엄청난 기회였다. 사람들은 이제,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사게 되었다. 언젠가 먹을 테니까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그야 ‘언젠가’ 다 먹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언젠가’ 먹을 것들을 사들인다. 그러나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에는 결국 한계가 있다. 그러니 대부분은 버려진다. ‘음식을 사고 버리는 문화’는 어쩌면 냉장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대량 생산, 대량 폐기. 이것이 경제를 움직여왔다. (134~135쪽)
냉장고는 ‘먹는 것’을 ‘살아가기 위한 중심축’이 아닌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냉장고 안에는 사고 싶다는 욕구와 먹고 싶다는 욕구가 터질 듯이 가득 차 있다. 인간의 욕망은 멈출 줄을 모르고, 한번 들어간 대부분의 음식은 두 번 다시 꺼내지지도 않은 채 생을 마감한다. 음식은 이제 더 이상 음식이 아니다.
냉장고는 세상에 처음 나올 때에 비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비대해졌다. 사람들의 욕망이 확대되어 가는 모습 그 자체이다.(136쪽)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수입이 줄어드는 게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 자체를 두려워해야 한다. 폭주하는, 더 이상 스스로 제어할 수 없게 된 막연한 욕망.
그 욕망에서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그 욕망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정말로 만족할 수 있을까.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일이다. 냉장고가 있다고 무작정 식료품을 채우며 결국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게 정말 내가 행복해지는 길인지, 제대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137쪽)
(가전제품 회사들은) 그때까지 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던 ‘편리함’과 ‘쾌적함’을 부지런히 만들어냈다. 아무도 ‘필요하다’고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점점 필요한 것이 되어갔다. ‘더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세상에 넘쳐났고, ‘왠지 필요한 것 같은’ 생각에 사람들은 사도사도 멈출 줄을 몰랐다.
이게 바로 ‘경제 성장’의 실체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해졌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물건이 많아지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고, 그건 분명 풍요로움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의 삶도 덩달아 커지고 복잡해졌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는 것은 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새 모두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방에 ‘당신에겐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메시지가 넘쳐난다. ‘그것만 손에 넣으면 행복해진다’고 외쳐댄다.
우리는 지금 ‘만들어진 혼란’ 속에 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231~232쪽)
전기는 우리의 욕망을 해방시키는 장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욕망은 일단 부풀리면 폭주하는 법. 그렇게 팽창한 ‘가능성’이 어느새 삶을 점점 더 복잡하게 만들고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게 된 게 아닐까.
지금은 어느 집이나 가전제품뿐만 아니라 온갖 물건이 넘쳐난다. 사람들은 이제 너무 많아진 물건들을 감당할 수 없어한다.(238쪽)
정신없이 사 모았던 가전제품을 모두 처분한 내가 이렇게 편해진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것은 가전제품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가전제품과 함께 부풀려온 욕망’을 버렸기 때문이다. (2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