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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오리 Jan 23. 2025

서브스턴스

  -나 홀로 시네마

서브스턴스(스포 있음)


 -제77회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영화 첫 장면.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바닥에 배치된, 배우 ‘엘리자베스 스파클’의 별을 클로즈업한다.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젊었을 때 오스카 수상 경력이 있는 여배우이다. 그렇지만 배우로서 인기가 사라지자, 지금은 TV 에어로빅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며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50세가 되는 생일날, 프로듀스는 그녀를 퇴출시킨다. 이유는 50이라는 나이는 퇴물이라는 것.


 충격을 받은 엘리자베스는 차를 운전해서 귀가하던 중, 자신의 모습이 담긴 대형광고판을 철거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쳐다보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았다. 그녀는 병원에서 만난 남자 간호사에게서 ‘젊음을 되돌려주는’ 정체불명의 신약을 소개받았다.


 그녀는 잠시 의심을 하지만 다급한 마음에 그 신약을 주문한다. 그 약을 주사하고 나서 그녀는 기절하고, 그녀의 척추가 갈라지면서 그 안에게서 젊은 미모의 ‘수’가 태어난다. 일종의 자기 세포복제, 혹은 자기 분신이라고 할 존재가 생겨난 것이다.


 이 약의 문제점은 두 사람, 즉 늙은 ‘엘리자베스’와 젊은 ‘수’가 7일마다 몸을 교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고 한 사람만 살아서 움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엘리자베스와 수는 결국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젊고 예쁜 수는 과거 잘 나가던 엘리자베스의 자리를 차지하고 방송에서 인기를 독차지한다. 수는 인기에 정신이 팔려 신약의 규칙을 어겨가며 꼼수를 쓰고 일주일마다의 교환 시기를 수시로 어긴다.

 그 결과로 엘리자베스의 몸은 심하게 망가지고 점점 괴물처럼 변하기 시작한다. 괴로워하던 엘리자베스는 교체의 날에 신약사용을 중지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최고 스타로서의 중요한 일정을 남겨두고 누워있는 젊고 아름다운 수를 보는 순간, 자신의 결심을 포기하고 젊은 수를 다시 불러내기로 한다. 수가 바로 젊은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젊은 수가 깨어난 순간, 수는 엘리자베스가 신약 사용 중지를 시도한 증거를 보고 흥분해서, 엘리자베스를 심하게 폭행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수는 중요한 방송에 출연하려고 방송국에 가지만 갑자기 코피가 나고 이가 빠지는 등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황급하게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모습이 흉측하게 변한 것을 보고 놀란다. 엘리자베스와 수가 합쳐져서 괴물모양으로 변한 몬스트로 엘리자수가 탄생한 것이다.

그녀는 젊고 예쁜 자신의 얼굴 사진을 오려서 얼굴에 붙이고 다시 방송국 무대에 오른다.


 무대 위에서 그녀는 말하려고 하지만 괴물의 목소리가 나올 뿐이었다. 그때 그녀의 몸 여기저기서 피가 쏟아졌다. 그 피의 양이 엄청나서 방청석에 앉은 관객들에게까지 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놀라서 아우성을 지르고, 공연장은 피바다로 물들어갔다.


 그녀는 피를 엄청나게 쏟아내며 힘들게 걸어서 명예의 거리 바닥에 배치된 자신의 별까지 갔다. 거기서 그녀의 몸은 산산이 흩어지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만 남다가 결국 그 얼굴마저 형체가 없는 오물투성이로 흩어졌다.



 이 영화는 몸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삶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인가?

혹은 욕망에 대한 이야기인가?

어쩌면 그 모두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몸은 젊고 건강하고 아름다울 때만 가치가 있는 것인가.

자본주의 사회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상품으로 가치를 매기고 있다. 상품 가치가 있는 것은 돈을 벌 수 있는 것이고, 돈은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만능키로 여겨진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젊음은 가치 있고 노화는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특히 여자들에게 젊음과 아름다움은 절대적인 것으로 주입되었다.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사회체제는 특히 여성들에게 외모에 대한 무의식적인 억압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여자들의 몸을 상품화하고 그 가치 평가를 하는 것은 남자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은 남자들도 멋진 몸만들기 열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도대체 ‘몸’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사람들을 구속하고 억압할까?

 몸은 인간의 영혼을 담는 그릇이기에 물론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다만 외양일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몸에 담긴 영혼이 아닐까. 내면의 중요성은 간과하고 오직 외면의 모습에만 열광하는 현 상황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엘리자베스가 젊고 예뻐지기를 원한 것은, 그녀의 순수한 욕망 때문인가, 아니면 사회 분위기가 무의식적으로 주입된 것인가.

 그녀는 가부장적 제도와 상업주의가 혼재된 사회체제가 만든 잘못된 가치관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녀에게 전혀 책임이 없지는 않다. 주체적인 자신의 삶을 살지 않고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노예의 삶을 선택한 잘못이 있다.

 그러나 개인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체제의 분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내기가 쉽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젊음에 대한 끝없는 욕망으로, 성형외과와 피부과병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좋은 일인가, 혹은 나쁜 일인가. 둘 다 아닐 수 있다. 상황에 따라 적당히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적당히’가 아니라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이런 현상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는가이다.


 언젠가부터 노인은 지혜로운 존재로서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폐기 처분되어야 할 오물처럼 여겨지고 있는 듯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엘리자베스가 오물투성이로 흩어진 것처럼.

 이 영화 제목이 The substance이다. ‘substance’는 물질이라는 뜻이다. 물질은 영원하지 않고 늘 변화한다. 우리 몸 역시 물질이므로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노화는 혐오해야 할 현상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시간에 역행해서 늙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 노화는 배척당해야 하는가. 인간은 자연을 거스를 수는 없다. 자연에 저항하면 반드시 몬스트로 엘리자수처럼 부작용이 생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들은 자연의 섭리를 부정하려고 하는 걸까.

 그 이유는 욕망 때문이 아닐까. 욕망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인간은 욕망을 버리지 않는 한 필멸하기 마련이다. 그 필멸의 순간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어코 선을 넘는다.

욕망의 극한에는 파국이 있을 따름이다.



 엘리자베스가 관중들에게 엄청난 피를 뿌린 것은, 자신을 파멸시킨 가부장체제의 대중들에게 복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피로 칠갑한 듯한 마지막 장면의 난장판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에서 카타르시스 catharsis의 시원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너무 자극적이고 매운맛의 음식을 먹으면 그 자체의 고유한 맛을 상실하게 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으로까지 나아가버린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메시지를 오히려 흐리게 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충격적인 장면에 경악한 나머지,  진짜 메시지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 점이 무척 아쉬웠다.  





사족: 영화감독(코랄리 파르쟈)이 여자여서 이런 영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왠지 남자감독은 만들지 못할 작품 같다.

이 영화로 주인공 역의 데미 무어는 생애 첫 연기상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82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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