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보내며
처음 만났을 땐 너무 인상이 거칠고 세다고 생각했다.
가죽옷을 입고 뺀질거리는 모습이라니. 아무리 봐도 영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근데?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치는 거다. 이야기를 할 때는 필요한 말만 딱딱 골라서 할 줄 아는 센스가 있었고, 제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대화의 여백을 은근히 챙겼다. 게다가 언제 들어도 세련된 음악적 취향까지 갖고 있는 거지. 어쩌겠나, 결국 어느 순간 홀딱 빠져 버리는 수밖에.
이건 소개팅에서 만난 상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번 시즌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보며 느꼈던 나의 인상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형 일주일 전을 재해석한 이 이야기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대로 사용하되, 사건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더했다. 원제가 유다 이스카리옷 수퍼스타가 될 뻔 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가장 방점을 두고 있는 인물은 유다.
배신자, 악인으로 해석됐던 인물에 대한 성경 기반의 관점을 뒤집고,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 유다를 과감히 읊는다. 예수를 몰래 팔아넘긴 야비한 인간에서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한 인물로, 악한 마음을 숨기고 제자인 척 하던 위선을 인류를 구원하는 위대한 예언에 사용되는 불쌍한 희생양으로.
유다를 향한 새로운 시선을 더하는 극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계속 말을 걸어오는 인물은 아무래도 예수였다. 기독교에서 삼위일체란 하나님이라는 신이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영으로서 존재하며 세 개의 격이 하나로 있다는 개념이다. 서로 다른 세 개의 인격이 하나로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이 개념을 상기하며 이 극을 볼 때면, 예수의 모든 순간, 모든 나날을 어떤 시선으로 쫓아야 할지 늘 마음과 생각이 바빴다.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
그 바쁜 고민들은 예수의 죽음을 마주할 때까지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극중에서도, 그리고 성경에서도 예수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마지막 말은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는 문장.
이 문장을 마주할 때마다 재밌는 점은 한국어로는 능동태로 구성된 문장이 영어로는 수동태의 문장으로 구성됐다는 것. 덕분에 예수의 모든 궤적들이 어떤 날에는 모든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지난한 고통을 감당하는 신의 모습으로 읽혔다가, 또 어느 날에는 아버지에 의해 모든 삶을 순종적으로 바쳐야 하는, 죽임 당하려고 태어난 희생양이 보였다. 어느 쪽이든 그토록 지난한 외로움과 싸워야 했을 예수의 마음이 너무 외롭고 고단해 나는 연신 마음이 쓰였다.
수동태와 능동태 사이를 바삐 오가는 삶은 비단 예수만의 것은 아닐 거다. 제아무리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나간다 해도, 모든 삶은 은연 중에 많은 것들에 의해 흘러가기 때문이다. 세상이 정해둔 기준, 적당하다 믿는 평균의 가치, 타인의 욕심과 주변인들과의 비교 등등. 하루에도 수천번씩 몸을 곧게 폈다가도 움츠러 드는 삶, 나의 선택을 여러 번 의심하고, 또 다시 믿는 삶.
여러 번 삶의 상태를 고쳐 쓰길 반복하는 건 신도, 예수도, 나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답이 정해지지 않은 극이라 좋았다. 이 극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이 극이 남기는 이야기는 무엇인지 여러 질문들 사이에서 유영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무궁하게 열려 있는 공백들 사이에서, 핀잔 받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나만의 생각을 연신 수놓을 수 있던 시간들이었다. 물론, 아직도 못 다한 질문들이 여전히 가득하다. 묻고 싶은 질문도, 나누고 싶은 생각도 많은데 어느덧 극은 이별할 준비도 없이 훌쩍 떠났다.
시몬, 혹은 베드로 혹은 마리아가 된 듯한 마음으로 애꿎은 후회로 밤을 지샌다. 아! 이렇게 아쉬울 줄 알았다면 더 열심히 보는 건데, 매번 뒤늦는 이 마음을 어찌 하나, 이것이 사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