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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꾹이누나 Aug 17. 2023

여름의 색깔은 푸르름

부산근교 다원에서 만난 #부산의초록빛

한바탕 소란스러운 태풍이 지나가자 거짓말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비록 더운기 섞인 바람이지만 얼마간의 열기는 이 땅의 모든 것을 바싹 말려버릴 기세였기에 그 바람마저 반갑게 느껴진다. 무더위가 채 가시기도 전에 성큼 다가오는 입추에 '벌써 입추야? 말도 안 돼' 했다가, 그날이 지나고서는 ' 야 24 절기 진짜 소름이지 않냐? 조상님들은 어떻게 이걸 알았지?' 하는 시답잖은 말을 정말이지 매년 반복하고 있는 우리다.

지나가는 여름이 아쉬워서 사진첩을 뒤지다가 갤러리 가득한 파란색 가운데 초록빛이 눈에 띄었다. 바다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지만, 그날만큼은 왠지 녹음이 그리워져 부산 근교에 있는 다원을 찾았다.




외향형 인간이지만 지인방문 없이 홀로 보내는 부산에서의 주말에는 동네 밖으로 잘 나가지 않게 된다.

- 부산사람은 나와바리 밖으로 잘 안나갑니더

이른바 부산인들의 '나와바리론'몇 번이나 들었기 때문일까? 나 역시 부산에 젖어들고 있다는 우스운 핑계를 늘어놓으며 집콕하는 주말이 늘어가는데, 그도 그럴 것이 부산, 특히 여름엔, 어디든 관광지가 되어 방문객으로 북적이기 때문에 조금은 피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괜스레 초록빛이 그리워진 어느 일요일, 녹음 짙은 조용한 장소를 찾아 한 시간 남짓 달려 김해 장군차 산들농원이라는 카페에 도착했다.



한적한 시골마을 길 따라 굽이굽이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마주하는 이층짜리 건물과 초록색 차밭에 보자마자 여기다! 하고 안도하게 되는 곳이었다. 건물 외관은 여느 근교카페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지만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큼직한 (아마도 차 덖는) 기계들과 수수한 테이블에 마음이 놓였다. 억지로 꾸미지 않아 투박하니 좋은 내부를 한 바퀴 찬찬히 둘러보다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골마을 속에 숨겨진 평화로움에 몰래 들어와 있는 기분에 마음이 괜스레 얄궂게 되어 생전 안 마시던 달달한 아이스 말차라떼 한 잔을 주문하고 창가에 앉았다.(자고로 음료든 술이든 액체는 단 걸 안 좋아한다)


달달한 아이스 말차라떼 한 잔


서로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이리저리 분주히 다니시는 걸로 보아 가족이 일궈나가는 카페인 듯했다. 창에 앉으니 다가와 창가에 쳐진 커튼을 조용히 걷어주시고, 차를 시키면 다식이 나오는데 말차라떼여도 아쉬우니 같이 곁들이라며 떡을 조금 내어주셨다. 온통 푸르른 녹음 속에 앉아 같은 빛깔의 달달함에 기분이 좋아질 무렵 여기까지 왔으니 차 좀 맛보라고 차를 한잔 주셨다. 거듭 사양하니 어차피 자기들 마시려고 내리는 거니 부담 갖지 말고 맛보라며 구수한 호박차를 따라주셨다.


달달하다가 구수하다가, 그 기분 좋은 배부름에 창밖을 보니 그저 초록빛 가득한 게 문득 여름의 색깔은 파란색도 아니고 초록색도 아닌 푸르름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진짜 평화로웠던 어느 여름날


이제 며칠 지나면 바람에 더운기 한결 가시고 선선함이 느껴질 터다. 가을이 지나고 트렌치코트 입을까 말까 어버버 하다가 또 조금 있으면 싸르르 추위가 다가올 테고 그러다 (아마도 부산에는 안 올 테지만) 눈이 흩날리기 시작하겠지. 이렇게 산등성이 넘듯 더디지만 또 무탈하게 계절 가는 걸 오감으로 느끼며 부산에서의 첫 해를 넘어가고 있다. 그야말로 온전히 즐긴 푸르른 부산의 여름 끝에 조금은 평온해진 나 자신을 보곤 한다.


푸르른 여름날이 다 지나가기 전에 달콤 말랑 한 복숭아나 한 번 더 사 먹어야겠다. 부산에서의 시간이 평안해서이기 때문일까, 올해 복숭아는 조금 더 달콤한 것만 같다.


좋아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마지막 장면.                                                  "지안, 평안함에 이르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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