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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꾹이누나 Jul 19. 2023

원래 여름은 덥고 습한 거란다

#습도가득한부산 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장마철이다.

전국 어디든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퍼붓다가 또 잠깐 멈칫하다를 반복하는 변덕스러운 날씨다. 하늘은 잠깐 마를지언정 쏟아진 비에 이 마를 리 없고 공기마저 축축한 나날들이다. 원래도 바다가 있어 습도가 꽤 있는 편이지만 장마철의 부산을 거닐다 보면 축축한 공기가 온몸에 쩍쩍 감기는 것만 같다.


- 더위를 잘 안 타는데 요즘 땀이 다 나네. 부산이라 그런가?

- 그래? 근데 원래 여름은 덥고 땀나는 거 아냐?


생각해 보면 여름은 래 덥고 습하기 마련인데 유난스레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다. 물론 사방천지 바다니깐 조금 더 습한 건 사실이라지만 땀 조금 더 맺힐 뿐 크게 다를 게 없는 그저 여름일 테다. 3면이 바다인 땅덩어리에서 쾌적한 여름은 전기료 가득 태운 에어컨 바람이 아낌없이 뿜어져 나오는 실내에서나 느낄 수 있는 즐거운 사치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계절 따라 변하는 날씨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을 욕심 따라 거스르다 보니 이제는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어색히 느껴지는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워졌다.


해무 가득한 해운대의 밤


이제는 까마득한 스무 살의 어느 날, 습도 100에 육박하던 홍콩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는 삶에 대한 고민도 없고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뭐든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만 가득할 때라 마냥 활기차고 즐거웠다. 외에서 데이터를 쓰며 스마트폰을 쓴다는 게 쉽지 않았던 때였기에, 지금이라면 지도앱으로 금방 찾아갈 거리를 그때는 지도도 뭣도 없어 그저 홍콩 살던 지인이 간략히 일러준 대로 더듬더듬 길을 찾아갈 뿐이었다.


왔던 길을 돌고 돌고 돌다가 어떤 항구를 마주쳤는데 물 색이 에메랄드빛으로 청량했던 게 기억이 난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사진 몇 장을 남겨가니 지인이 본인도 처음 보는 곳이라고 도대체 이런 곳은 어떻게 찾아간 거냐며 물었을 때, 돈도 정보도 없던 젊은 날의 나는 그저 발길 닿는 대로 하염없이 걸었을 뿐이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습기 가득한 여름날이었지만 그저 이국적인 왁자지껄 홍콩의 거리가 흥미로웠을 뿐이었고, 그래서인지 홍콩은 언젠가 한 번쯤 꼭 다시 가보고픈 나라로 마음속에 두고두고 남아있다.




시간을 거슬러 최근 몇 년간 서울에서의 여름. 사실 여름이 어땠는지 계절이 오는지 가는지를 느낄 새도 없이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바쁜 탓도 있겠지만 서울에서의 나날은 무언가에 쫓기듯 정신없고 긴박하며 숨 막혔다. 서로 눈치 주고 눈치 보는 각박함 속에서 억지로 힐링을 쥐어짜고자 부단히 발버둥 쳤던 것도 사실이다. 남들 다 가는 핫플이나 몇 군데 가는 게 힐링이라며 소비에 집착하는, 말하자면 모두가 모두에게 떠밀리듯 살았던 삶 속에 여름은 그저 숫자 7, 8, 9 일 뿐이었다. 쫓기듯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어느새 가을이고 겨울이고 또 새해가 오고 그런 식이었다.


부지런히 찾아보려고 했던 힐링의 흔적(전국 힐링자랑)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요즘, 습하면 습한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여름을 견뎌내는 중이다.


며칠 전에는 부슬비 내리는 마린시티 바닷가를 달렸는데 어느 걸음에는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고 또 어느 걸음에는 더운 바람이 몸을 감싸며 불어왔다. 그러다 테트라포드 사이로 파도가 잘게 부서져 들어오는 소리를 듣자 하니 틈새로 작은 파도가 다시금 만들어지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 소리가 마냥 귀여웠다.

어느 날은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보며 친구랑 치맥을 먹었는데, 그 빗소리가 너무 시원해서 흩뿌리는 잔 물방울에 셔츠가 젖는 것도 몰랐다. 하루는 동생이 부산에 와 밤에 해운대 해변을 걸었는데 공기는 축축하고 무겁게 가라앉았을지언정 발만 담갔을 뿐인데도 온몸에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바닷물이 시원해서 파도 따라 기분 좋게 발을 담그고 걸었다.


축축했지만 산책은 절거워~
비가 윽수로 쏟아진데이


비가 잠깐 그친 오늘 날씨는 뜨거웠지만 오랜만에 만난 덕인지 쨍한 하늘이 무척이나 청량하게 느껴졌다. 며칠간 비를 쏟아부은 덕에 공원에는 잔디며 작은 정원수마다 불쑥불쑥 키가 자라 있어 푸르름이 더해지는 모양이었다.




본디 여름 덥고 습하니 또 견디게 된다. 더우면 더운 대로 견뎌도 보다가 시원한 아메리카노나 밀면에 몸을 조금 식히면 된다. 습도 가득한 부산이라 빨래가 잘 안 마르는 건 솔직히 아쉽지만, 땀 닦아내며 온몸으로 맞는 바닷바람의 시원함은 습도가 있어야 더 뼈 리게 느낄 수 있다. 손 뻗으면 바다가 잡히는 도시이기에 가까운 바다로 가서 발 담그면 느껴지는 여름의 기분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


원래 여름은 덥고 습하다.

계절 가는 속도에 몸을 맡기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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