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는 7곳의 해수욕장이 있다. 모두가 알고 있는 부산 대표 관광지인 해운대, 광안리, 다대포에 이어 해상 케이블카가 있는 송도, 서핑으로 유명한 송정, 그리고 기장에 있는 일광, 임랑까지 해수욕장 여러 곳을 다녀보는 것도 부산의 색다른 매력이다. 해운대와 광안리는 이미 너무 알려진 관광지이기도 하고 다대포와 송정 역시 서핑의 성지로 여름 내내 방문객이 이어지는데, 일광이나 임랑 해수욕장은 상대적으로 외지인의 발길이 많지는 않은 곳이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분들과 송정 바다에 갈 때면 버릇처럼 예전에는 민박집이 즐비한 시골바다가 언제 이렇게 변모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송정은 해운대에서 차로 15분가량 떨어져 있어 가깝기도 하고 해운대에서 출발하는 해변열차도 있고 주변에 카페도 많이 들어와있어 여름철에는 제법 관광객으로 교통체증까지 생기곤 한다. 그들이 말하는 '그 시절 시골바다'의 모습이 궁금할 즈음, 무심코 가보지 못한 한적한 해변에 가보고 싶어서 무턱대고 내비게이션에 '임랑 해수욕장'을 찍었다.
도착한 임랑 해변은 거니는 사람이 한눈에 들어올 만큼 한적한 모습이었다. 나 역시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물만 있으면 우후죽순 들어선 초대형카페에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임랑에는, 적어도 내가 도착한 귀퉁이에는, 주차할 차량으로 득시글한 대형카페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득하지만 말귀는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대화소리만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고, 대신 부서지는 파도소리만이 공간을 장악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혼자 해안도로를 따라 운전하는 건 자연스러운데, 찬바람이 밀려오는 해변을 혼자 거니는 건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주차하고서도 한참을 차 안에서만 바다를 바라보다가 용기를 내 해변가로 향했다. 역시나 바다를 혼자 찾은 이는 많지 않았으므로 가족이든 친구든 삼삼오오 어울린 사람들 사이로 조용히 내 속도대로 모래사장을 걸어갔다.
때마침 백예린-산책 이 나와서 조금 소름돋았다, 물로 그린 그림처럼 사라진다고 해서
시간이 오후 5시였으므로 시시각각 저무는 해에 하늘색이 자꾸만 바뀌었다. 하늘이 변하니 바다의 색도 따라 달라졌다. 모래사장이 끝나는 지점에 세월이 느껴지는 건물을 뒤로한 채 벤치가 쪼르르 서 있었다. 거기에 앉아 한참을 파도소리에 취하다가, 밝았다 또 우울해지는 바다를 보았다가, 저기 저 뒤 시선에 머무는 파도가 크게 살아나서 힘차게 부서지기를 바랐다. 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조금 듣다가, 엄마아빠를 따라온 귀여운 꼬맹이가 우다다다 다가와 옆에 앉길래 조금 웃었다가, 다시 생각의 스위치를 끄고 멍하니 파도를 바라보았다.
한쪽에는 시골바다 방파제의 느낌을 잃지 않은 길이 있어서 따라가 보았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보였고 멀리 서핑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정박해 둔 고기잡이 배가 바람 따라 흔들리니 비린내가 훅, 훅, 밀려왔다. 흘러가는 바닷바람 속에 섞인 바다 비린내는 어쩐지 정겨운 느낌마저 주었다.
바다는 깨끗이 이용!
차에 앉아 냉장고에 남은 재료로 얼기설기 싸 온 김밥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구나. 올여름은 생각보다 너무 무더워서 언제 끝나려나 고대했는데, 어김없이 찬 바람이 불어오는구나, 했다.
세련된 카페들이 즐비한 바닷가, 그것도 완벽한 인테리어의 카페 창너머 보이는 이른바 '오션뷰'만 주로접하다가 적막이 감도는 시골바닷가에 홀로 있자니 예전에 본 홍상수 영화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꾸밈없는 날것의 감정을 극대화시켜주던 외롭고 쓸쓸한 시골 바다. 세련미 하나 없는 바다는 나를 꾸미고 있던 모든 포장지를 한꺼번에 훌렁 벗겨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화장기 하나 없는 날것의 느낌으로 바다에 홀로 서서 나름의 속도로 그러나 끊임없이 부서지는 파도를 온몸으로 느끼니 감정이 더욱더 초연해졌다. 될 대로 돼라, 될 대로 돼라. 부산에서의 세 번째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