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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Aug 30. 2022

솔직한 거짓말쟁이 <리플리>

영화 <리플리> 감상 리뷰 - 결말 포함


  잘생긴 상류층 남자 딕키와 어리숙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지만 별 볼 일 없는 남자 리플리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회적 강자는 솔직하고 반대로 약자일수록 가면은 두터워진다. 가난을 자랑 삼는 사람이 없고, 힘이 약하고 못난 것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잘난 것을 사랑한다. 잘생기고 예쁜 사람,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 부유층의 삶, 남부러울 것 없는 배경, 심지어는 매력적인 품성까지도. 잘나야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고, 그런 것만이 진정 우리가 바라는 바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속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절대로 스스로 속물이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속에 특별함이 있다고 끝끝내 믿고 싶어하는 웃기는 종자들이다. 내가 명품 백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게 비싸기 때문이 아니라 장인의 고고한 기술이 유독 특별한 것이어서, 나의 고상한, 혹은 고유의 취향에 적중해서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우리의 취향은 절대적으로 존중 받을 가치가 있는 고유의 무언가라고 종교처럼 떠받들고, 지키고, 믿으려 애를 쓴다. 우리는 자기기만에 빠져 산다.

  반면에 리플리는 어땠을까? 리플리는 자기객관화에 통달한 인물이었다. 리플리는 자신이 딕키가 아니고, 죽었다 깨어나도 딕키로 태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한 리플리는 딕키가 되고 싶었다. 딕키가 누리는 것들은 모두 리플리가 꿈꿔온 것들이었다.

  부호인 아버지를 둔 딕키는 망나니에다가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원하는 모든 걸 누리며 살았다. 사랑하는 여자를 데리고 머나먼 이국에서 매일 휴양과 술과 또 다른 여자와 친구와 파티와 재즈를 즐겼다. 원한다면 허름한 시골 구석의 별장에서 지내기도 했고, 초호화 호텔에서 묵기도 했다.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는 딕키는 막무가내에, 변덕쟁이처럼 보였다.

  리플리가 대중교통이 끊길까 봐 어쩔 줄 몰라할 때도 딕키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만 쳤다. 막차가 끊기기 전에 간신히 집에 돌아온 리플리보다 훨씬 늦게 떠난 딕키는 친구의 스포츠카를 타고 고작 십여 분 간격으로 도착했다. 그러는 바람에 딕키의 옷을 몰래 꺼내 입고 '딕키 놀이'를 하던 리플리는 그 모습을 당사자에게 들켜버리기도 한다.

   딕키는 금전으로나, 배경으로나, 무엇으로도 그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루고도 남을 만큼 갖추었기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약혼자가 있는 현지의 가난한 여자를 꼬드겨 밀애를 즐겼다. 그러다 여자가 임신을 하자 그녀를 버렸다. 딕키에게 있어서 그 여자는 잠깐의 일탈일 뿐이었다. 딕키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았고 버려진 여자는 그 중 극히 일부였기에 딕키의 인생은 달라질 게 없었다. 버려진 여자는 길가에서 좌판을 벌여 물건을 파는 행상이었다. 딕키에게 버림 받고 여자의 인생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그랬기에 여자는 바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버렸다. 딕키도 잠시 마음이 아프기는 했다. 그는 집기를 발로 걷어차 부숴뜨리고는 씩씩거리며 집을 나갔다. 그리고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 여자를 잃고도 여전히 그에게는 아름다운 약혼녀가 남아 있었다.

  리플리는 딕키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의 사랑은 탐하는 욕망이었다. 리플리는 딕키를 탐했다. 딕키와 기차를 탈 때면 리플리는 엉뚱한 짓을 했다. 차창에 비친 잠든 딕키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반쯤 포개곤 했다. 언젠가는 딕키가 욕조에서 목욕을 하는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리플리가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상황이 불편해진 딕키는 장난스럽게 자리를 피했다. 이런 대목마다 동성애적 코드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진정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것을 지켜주려고 한다. 리플리가 딕키를 향해 품고 있는 사랑은 그런 의미의 사랑이 아니었다. 리플리는 딕키로서 사는 인생 자체를 원했다.

  거짓말의 시작은 딕키의 아버지가 연 파티에서 피아노 연주를 해준 날 입고 간 프린스턴 대학의 재킷으로 딕키의 아버지로 하여금 리플리가 프린스턴 출신이라고 믿게 하고부터였다. 그런 후 딕키 아버지의 부탁으로 딕키를 찾아 이태리로 가서는 본격적으로 거짓말의 굴레에 들어가게 된다. 리플리는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상류층 아가씨에게 자신을 딕키라고 소개했다. 매력적인 상류층 아가씨에게서 잠깐의 환심을 받고자 했던 거짓말이었다. 리플리는 아름다운 아가씨 앞에서 자신을 지하방에서 사는 호텔 보이라고 소개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소개해서는 관심 받지 못할 게 뻔했다. 이후로 리플리의 거짓말은 점점 더 크게 불어났고 그의 목을 조여왔다.

  거짓말의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솔직하게 모든 걸 고백하고 지금까지의 생활을 청산한 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하나와 거짓말이 실제가 되게 하는 것 하나였다. 리플리에게는 행운이, 딕키에게는 불행이 동시에 찾아왔다. 두 사람은 망망대해 한복판 작은 요트에서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딕키는 리플리를 추궁하기 위함이었다. 겁이 많고 유약한 리플리가 단둘이 남겨진 곳에서라면 얼마든지 거짓말해온 사실을 고백할 법도 했다. 만약 딕키가 좀 더 개연성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방식이 얼마나 위험한지 짐작했을 것이다. 능수능란한 거짓말 속에서도 드러나는 자신을 향한 집착과 끈질긴 욕망을 이미 읽었음에도 딕키는 최악의 수를 던지고 만다. 리플리는 원하는 것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지려는 사람이었다. 절호의 기회를 잃어버릴 바보가 아니었다. 리플리는 요트의 노를 휘둘렀다. 딕키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고 머리에서부터 피가 흘러나왔다. 딕키의 얼굴을 완전히 뭉개버리고 요트에 구멍을 내 가라앉히고 리플리는 헤엄쳐 인적이 드문 해안가로 돌아왔다.

  리플리는 곧바로 딕키의 모든 것을 빼앗기 시작했다. 그동안 지내며 보고, 듣고, 유심히 관찰했던 기억력을 총동원해서 위조된 문서와 신분증 등으로 딕키의 돈을 가지고 완전히 행색을 탈바꿈했다. 외딴 곳에 집을 사서 자기 취향으로 꾸미고 고급 옷과 신발로 자신을 꾸몄다. 그가 만약 딕키로 태어났다면 이렇게 살았을 거라 망상하던 일들을 실현해갔다.

  재벌 사칭의 삶은 숨막히도록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웠다. 언제 들킬까 몰라 조마조마했기에 다시는 누리기 힘든 호사스러운 생활을 이어가면서 불안한 상황으로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었다. 리플리는 거짓말이 들통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방해되는 사람들을 은밀히 제거했다. 그 중에는 리플리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리플리의 손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끔찍한 신음소리와 절규와 환희로 통곡하는 리플리의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대미를 장식했다.

  우리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할 수는 있지만 나 또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쉽게 망각다. 사실 리플리는 오늘날 어디에서나 마주치는 한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나마 리플리가 더 나은 점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가 자기 본성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제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선자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우리가 거짓말의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두 가지가 아니길 빈다. 거짓말을 실제화하려고 노력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 끝은 절규와 소름끼치는 환희가 뒤섞인 완벽한 자기합리화의 완성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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