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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May 23. 2023

이름에 대해서

19.12.5 짧은 산문

  마침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어서 우연찮은 일들에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또 금방 놀랄 만큼 큰일은 아니지 않느냐는 머리 반대쪽에서의 빈정거림이 들려왔다. 어쨌든 이름이 가진 오묘한 힘에 대해서 곰곰 생각이 든다.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이름을 갖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도 연세 드신 노인들 중에는 이름이라 하기 민망할 정도로 의미가 빈약한 -말째라서 말순이라는 식의- 이름 석자로 평생 살아오신 분도 드물지 않다. 이제는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름이라는 튼튼한 자기 정체성의 울타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존재감'이라는 불안을 조금은 덜었지 않을까 싶다. 그런고로 이제쯤에는, 이제쯤이라는 것은 시간이 이토록 흘러서 친분도, 익숙함도 서로에게 생긴 요즘 무렵이라면 적당히 지나가는 사람 낚아채 부르듯 하던 호칭은 그만 접어두고 내 이름을 친근하게 불러줄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이름에 '씨'나 '님' 같은 격 있는 존칭도 치워버리고 좀 더 편하게 이름 두 글자만 불러도 마음 한결 가까워지지 않겠느냐는 속내였다. 어쨌든 호칭에 대해서 나만 까슬까슬한 니트 같이 성가시게 느낀 게 아니었던지 호칭은 단숨에 달라졌다. 그런 게 뭐 대수냐, 큰일은 아니다만 이름이 가진 묘한 힘을 느끼게 되면 대수롭지 않지 않은 일이 된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영화 속 주인공이 이름 없이 내내 9327번이라는 번호로만 불리다가 갑자기 엔딩씬에서 누군가가 그를 "에드워드!"하고 불러버리면 어떨지 상상해 보라. 이름은 무의미하던 것에 의미를 심어주고, 영원히 확장되어 안개처럼 흐려지고 흩어지던 존재감을 하나로 꽉 묶어준다. 그런 뜻에서 처음 내 이름이 불려진 날, 그게 얼마나의 의미를 가졌건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도약이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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