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지하철에서 내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등줄기에 땀이 흘러내리는 후텁지근한 날이었다. 북태평양의 바닷물을 머금은 바람은 해가 져도 여전히 뜨거웠다.
광화문을 지나 종각 근처에 이르니 주말 저녁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북적인다. 나도 인파의 흐름을 따랐다. 이리저리 휩쓸려 가다 고개를 드니 어느덧 약속 장소였다. 우리 이게 몇년 만이야. 익숙한 얼굴들이 고개를 돌리고 환하게 웃는다. 군대 친구들이었다.
막차 시간이 다가오자 한두명 자리를 뜨고 넷이 남았다. 술병이 쌓이고 사람이 적어지면 이야기가 깊어지는 법이다. 내가 평소에 즐겨 가는 서촌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남자 넷의 얘기는 자연스레 연애를 소재로 옮겨갔다. 넌 왜 아직도 연애를 안 하냐,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거지 인마, 같은 뻔한 얘기를 뻔뻔하게 주고받는다. 늘 그렇듯 비슷하게.
하지만 그날은 한 친구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다. 그것이,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다. 시끌벅적한 술집의 말들 가운데 그의 한 마디를 포착한 네 사람의 대화가 일순간 멈췄다.
나는, 만나는 남자가 있어.
...
진짜야.
복도 전세냈어?
성소수자. 동성애자.
이 말을 처음 들었던 것이 언제였던가. 대학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학생회관 우리 동아리방 옆에 ’마음 005’라는 동아리가 있었다. 학내에서 알음알음 알려진 게이 커뮤니티였는데, 사람이 들락거리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동아리 방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뭔가 신비한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을 마주치는 사건이 생겼다.
우리 동아리 사람들은 학생회관 복도에서 팩차기라는 실내스포츠(?)를 광적으로 즐기곤 했다. 남자들이 공놀이할 때 늘 그렇듯 오디오가 빌 틈 없이 괴성과 환호가 가득했는데, 하필이면 우리가 까불던 자리가 그들 동아리방 바로 앞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주 그 복도에서 놀아도 사람이 오가는 것을 못 봤던 터였다. 그런데 그날은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나와서 우리에게 정중한 항의를 해 왔다. 들락거릴 때 노출이 돼서 부담스러우니 가능한 다른 곳에 가서 해주셨으면 고맙겠다는 얘기였다.
2000년대 초반, 서울대 여학생들이 우유팩으로 팩차기를 한다며 조선일보가 신기하다고 보도한 사진
내 생각에 남자들은 스포츠를 할 때 몰입과 흥분으로 정신이 반쯤 나가있다. 그래서 운동하다가 곧잘 별 것 아닌 일로 싸우기도 한다. (평화로 충만한 내 인생에 딱 한 번 치고박고 싸운 것도 중학교 시절 농구할 때였다)
그런 우리가 ‘마음 005’ 사람한테 항의를 들었을 때 대부분의 속마음은 "너네가 뭔데? 복도 전세냈어?"였다. 그들의 입장과 처지를 모르니 고작 ‘들락거리기 불편’ 정도의 이유로 우리의 놀이를 방해하는 것에 반발감이 들었던 것이다.
엄마한테 혼난 어린애처럼 잠깐 의기소침해진 우리. 그래도 옆방 이웃이니 예의상 조금 옮겨가서 잠시 조심해주는 척 했지만 거의 5분만에 다시 소란스럽고 정신나간 상태로 돌아갔다.
그래도 우리는 학내 방송국인데다 나름 진보적인 동아리였는데, 지금 돌아보면 참 생각없었지 싶다.
성소수자를 다룬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의 주인공이 사는 프랑스는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주인공 로렌스가 겪듯 테러를 당하거나 직장에서 짤린다. 부모가 등을 돌리는 것은 다반사고 친구들도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건 자신이 피할 수 있었던 삶이 아니다. 다들 손과 발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듯 평균에서 조금 벗어난 성정체성을 가지고 태어났을 뿐이다. 그런 이유로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더러운 존재로 다룬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걷는 곳마다 역풍이 불고 멈추는 곳마다 감옥일 것이다.
우연치곤 특이하게 나는 군대 친구들과 모임을 하기 전 광화문 인근의 한 독립영화관에서 그 영화를 봤다.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의 한 장면
심장이 오른쪽에
우리 네 사람 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커밍아웃을 한 김군.
피식 웃으며 담담하게 얘기했지만, 가장 친한 친구 하나 외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가족들은... 아셔? 그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말을 해. 부모님도, 누나도 전혀 몰라.
다행히도 우리는 퀴퍼 행렬 앞에서 "동성애자는 사탄"이라고 목놓아 외치는 어느 기독교인들도 아니고 동성 결혼식장에 똥물을 투척했다는 할아버지들도 아니어서,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어렵게 말을 꺼낸 그가 침묵의 무게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한동안 아무 헛소리를 던지면서 같이 배시시 웃었다. 그가 어렵게 자신을 드러낸 이 순간을 부디 안온한 느낌으로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김군은 제대 후 어학연수를 갔던 나라에서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했다. 김군의 풋풋한 첫사랑이다.
그가 만난 남자는 한번 여성과 결혼을 했었고 아이도 있다고 한다. 그 얘길 들으니 문득 그 남자의 신산했을 삶에도 생각이 미쳤다.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끝내 결혼까지 한 뒤에도 결국은 불행해지는 자신을 발견했을 그와 그 주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순간...
김군은 공부를 마친 뒤 그를 따라 외국으로 나갈 계획이었다. 관광이나 여행 일을 하면서 세계를 떠돌 거라고 했다.
비록 그가 정든 동네와 가족까지도 모두 내려놓고 떠나야 하더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더이상 평범한 이성애자인척 살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세상에는 주류 혹은 다수에 속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실업자, 성소수자, 고졸자, 이주민, 다문화가정 아이들, 가난한 사람, 비수도권 거주자, 집 없는 사람, 아이 못 낳는 사람, 결혼 안 한 사람, 늙은 사람, 이혼한 사람 등... 심지어 심장이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위계에서 윗쪽을 차지하는 주류 혹은 표준이 아닌 삶의 모습은 이렇듯 무한히 많다. 어떤 면에서는 주류인 나 역시 어떤 면에선 비주류이자 소수자다.
그렇지만 자신이 어느 한 편에서라도 다수가 되면 그것을 부려 소수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를 차별하면서 자기 우월감을 확인해야 하는 게 인류의 본능이라면 차라리 다수들이 가진 이런 마음의 장애를 차별하는 편이 정의로울 것이다.
지난달 모처럼 순풍이 불었다.
원래 동성 부부는 법적 인정을 못 받아서 건강보험상으로 남남이었다. 그런데 대법원에서 동성 부부인 소성욱 김용민 부부에게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것이다. 동성혼 법제화로 가는 가느다란 징검다리가 놓였다.
뉴스를 보고 오랜만에 김군 생각이 났다. 숨 쉬기 힘든 나라를 떠난 김군은 지금 남반구 어느 나라에 살고 있다. 부디 우리 사회가 순풍을 맞는 돛단배처럼 쭉 나아가서 김군과 그의 파트너를 환대할 수 있는 곳에 이르렀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