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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Sep 07. 2024

하이힐 위의 100kg

록산 게이 <헝거>를 보고 나서 쓰다.


우리나라에 100kg이 넘는 몸무게에 도달해 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매우 드물 것이다. 나는 그 부피감과 무게감을 안다. 나는 한때 100kg을 넘겨본 흔치 않은 한국인 중 한 명이다.



100kg 체험담


그때는 처음 입학한 대학에서 성적불량 학사경고 누적으로 1년 만에 ‘잘리고’ 불가피한 재수를 할 때였다. 월드컵 때라 바깥이 들썩들썩하는데 독서실에 틀어박혀 공부를 해야 했다.


거의 새벽 두 시 문 닫을 때까지 공부를 하고 나면 매일 어김없이 김밥이나 패스트푸드 버거를 먹었다. 저녁 먹은 지 이미 8시간쯤 지나있었고, 집에 가서 한두 시간 더 공부를 하다가 자곤 했기 때문에 허기를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공부한다고 집 - 독서실 정도 오갈 때였으니 하루 운동량이라 봤자 1000걸음 정도에 불과했다. 반면 끼니때 밥도 많이 먹었고 새벽에 야식까지 즐겼으니 섭취하는 칼로리는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여름쯤 지나니 어느새 체중이 100kg을 돌파했다.


몸에 많이 신경 쓸 때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쯤 초등학교 졸업 동기들과 모임에 나갈지 말지는 몹시 고민이 됐다. 내 첫사랑이자 첫 여자친구가그 모임에서 만난 동창이었기 때문이다. 연초에 헤어지고 안 본지가 반년이 넘은 터였다.


하지만 껄끄럽다고 모임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내가 거의 주도했던 모임인데 재수한다고 다 놔버렸기에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래서 용기를 내고 술자리에 나갔다. 내 첫사랑은 나와 어색해졌기 때문인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부푼 몸이 조금 부끄러웠지만 오래간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며 편히 놀았다.



100kg... 0.1톤을 들어 올리는 사나이도 아니고 그냥 0.1톤의 사나이였던 나. 그런 거구를 이끌고 다닐 때도 나는 크게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지는 않았다.


덩치가 큰 남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함부로 막 쳐다보지 않는다. 남자가 살이 쪘다거나 뱃살을 타이어처럼 두르거나 덩치가 큰 것이 드문 일도 아니기에 시선을 줄 일이 못되었을 수도 있다.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으면서 이에 대해 다른 가정을 해보았다. 내가 여자였다면 어땠을까?


100kg의 몸무게는 내 재수생활의 평상심에 거의 아무런 악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내가 100kg의 여자였다고 해도 덤덤할 수 있었을까? 아니었을 것 같다.


마치 여성의 몸은 아담해야 한다는 무언의 법률이 있는 것처럼, 그것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심판자가 되어 시선도, 잔소리도, 평가도 냉혹하게 가하기 시작한다.


비유하자면 그 차이는 이런 것 아닐까? 편한 운동화를 신고 있는 100kg의 몸과 작은 하이힐로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는 100kg의 몸이 걸어간다. 매 걸음마다 겪는 스트레스와 시선의 커다란 차이. 몇 년쯤 이렇게 걸어가면 한쪽은 완전히 망가지지 않을까?



내게 이런 문제의식이 생긴 가장 큰 계기는 조카 - 열 살이 된 여자아이 예서 때문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예서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부쩍 거울을 보며 자기 외모를 불만스럽게 얘기하는 경우가 늘었다.  


어른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면 자신 있게 웃으며 귀여운 포즈를 취해주던 자신감 넘치던 아이였다. 늘 인기가 많았던 누나를 닮아서 쌍꺼풀 진 눈부터 하얀 피부까지 전형적인 미모에 표준 체중인데도 그랬다.


어느 날은 가방을 던지며 코가 너무 못 생겼어!라고 소리치는가 하면, 어느 날은 자기 팔뚝이 너무 두껍다며 살을 계속 꼬집었다. 매일 먹던 아이스크림도 일절 끊고 끼니때면 밥알을 세듯 깨작거렸다. 심지어는 어른들 다이어트하는 것처럼 식단에 탄수화물과 지방, 단백질을 나눠서 살찔 만한 음식을 피하기도 했다.



뼈에 스며드는 문화


예서가 자라온 십 년의 시간은 문화가 어떻게 한 사람의 삶에 스며들어 뼈를 이루는가를 관찰하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분홍색에 대한 선호나 동글동글한 캐릭터들을 곧잘 그리던 아이가 마르고 길쭉길쭉한 몸들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예상치 못한 외계인의 침공을 당한 것처럼 당혹스러웠다. 우리 집의 어떤 어른도 그런 전형화된 여성성을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 끝에 자신의 신체 이미지에 대해서도 어떤 이상적 형태가 아이에게 자리 잡기 시작한 듯했다. 장원영 같은 몸이 기준이라는 입장이 아이 안에서 확신으로 자라고 있음을 느꼈다.



여기에 불이 붙는 어떤 순간이 다가올 수도 있다.


어떤 어른들도 아이에게 완전한 사랑을 줄 수는 없다. 그렇게 생겨나는 결핍이나 외로움은 자라는 과정에서 한 번씩 인간의 마음에 어둠을 만든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빛을 밝혀 길을 찾아나가는 좋은 훈련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밤이 너무 길면 방황이 시작된다.


이때는 빛을 찾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열망이 생긴다. 여성의 마른 몸이 예쁜 몸이고 살은 게으름과 지저분함의 증표라고 믿는 사회에서, 어떤 소녀는 내가 빛나 보이려면 무조건 더 말라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다.


게다가 갈수록 냉혹해지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살찐 몸은 자기관리 능력이 없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살 없이 잘 관리된 몸은 SNS에 전시되며 그 자체로 주목과 관심을 끌고 외로움의 고통을 잠시 마비시킨다. 또한 어디서든 통할 자기관리 능력을 보여주는 확신의 스펙으로 쓰이기도 한다.



최근 5년간 식이장애로 병원을 찾은 10대 청소년의 숫자가 97.5%나 증가했다고 한다. 환자 10명 중 8명은 여자였다.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 여성 중에서도 폭토먹토 등 식이장애와 관련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폭토나 먹토는 칼로리 흡수를 막기 위해 음식 섭취 후 토하는 행위다. 먹고 토하느라 이가 상하고, 억지로 구역질을 하다가 위산에 손가락이 데고, 극단적 금식에 머리가 빠져서 탈모약을 먹어야 하고, 120이 넘는 ‘키빼몸’에 도전하는 챌린지를 하며 서로의 숫자를 인증하고… 어쩌다가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됐을까.


그리고 왜 이런 일들은 대부분 여성들이 겪게 되는 걸까.



누군가의 눈에는 국회와 용산과 검찰청 앞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터처럼 느껴지겠지만, 몸 역시 그못지 않은 중요하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이다.


다만 미디어가 정치권력의 전쟁을 과대 중계하는데 비해, 여성의 몸이라는 전장에서 남성의 시선과 자본주의와 여성의 자아가 만들어내는 전쟁은 그만한 주목을 받지 못할 뿐이다. 마른 몸을 당위로 여기는 세상에서 여성들은 매일 보이지 않는 전투를 수행하는 셈이다.


당신의 몸이 클수록...


록산 게이의 <헝거>는 우리가 이와 같은 충돌을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내면이 공격받고 폐허가 되었을지 가늠하게 해 준다.


“당신의 몸이 클수록 당신의 세상은 작아진다” 


록산 게이는 자신의 삶을 이 한 마디의 문장으로 축약한다. 이 문장은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진실을 보여주지만, 주어를 남성으로 바꾸면 금세 거짓이 된다.


<헝거>, <나쁜 페미니스트> 등의 저자 록산 게이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시작은 정확한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비표준적 몸을 가진 흑인 여성의 입장에서 스스로 겪어온 세상의 모습을 써내려간 <헝거>는, 어떤 학자보다 더 정확하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읽으려다 5년이나 묵힌 책을 이번에 다큐멘터리를 기획하며 읽었지만, 이 글과 같은 뜻을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보나쓰 : 주말쯤 좋은 것들을 보고 나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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