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검거작전>에서 이어집니다.
모든 것은 한 켤레의 운동화에서 시작되었다.
서울 강남경찰서 강력팀 형사들은 이병주와 이진구를 검거하면서 그들이 강도행각 후 은신해 있던 대전의 월세방을 수색했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쓰던 물건들이 어지럽게 쌓여있었다.
그때 이병주의 신발 한 짝이 눈썰미 좋은 젊은 형사의 눈길을 끌었다. 검은색 운동화였는데, 밑창에 약간의 핏자국이 묻어있었기 때문이다. 이병주에게 물어보니 병원에서 칼로 피해자를 협박하다가 상처를 입힌 적이 있는데 그때 묻은 것 같다고 얼버무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젊은 형사는 국과수에 혈흔 감식을 보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병주와 이진구가 범행 당시 거주했던 서울 송파구 일대에서 벌어진 강력사건을 살펴보았다. 사건 현장에 남은 족적이 이병주의 신발과 일치하면 여죄를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산더미 같은 자료들을 뒤지던 젊은 형사는 한 장의 사진을 보고 놀라 여러 번 눈을 껌뻑이며 들여다보았다. 불과 3개월 전 어느 살인사건 현장에 찍혀있던 피 묻은 발자국이 이병주의 신발과 일치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석촌동 전당포 살인사건 현장이었다.
곧이어 국과수 분석결과가 도착했다. 신발의 바닥과 끈에서 채취한 혈액이 석촌동 전당포 살인사건 피해자의 DNA와 일치한다는 회신이었다.
피해자들이 피를 흘린 이후 경찰 도착 전까지 이병주가 거기에 발자국을 디딜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가 살인범이라는 강력한 신호였다. 강남서 형사들은 침착하게 사건을 파악한 뒤 이병주와 이진구를 추궁했다.
결국 이병주는 석촌동 살인사건을 자백했다. 처음에는 살인에 대해 부인하던 이진구도 이병주가 자백을 한 뒤에는 자신도 공범임을 실토했다.
경찰 자료에는 자백 후 이병주와 이진구가 강남경찰서에서 조사받을 당시의 풍경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경찰서에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들었다고 한다. 이진구는 주소지도 아닌 대구에 숨어있던 나를 어떻게 찾아냈냐며 도리어 경찰을 칭찬하고, 이병주는 오늘 저녁에는 매콤한 김치찌개를 먹어야겠다며 경찰한테 주문을 요구하기도 했다.
최초의 번복
자백과 유죄의 거리는 꽤 멀다.
질 나쁜 범죄자들은 한번 범행을 인정했다가도 곧잘 말을 뒤집는다. 검거 직후에는 심리적 압박에 범행을 실토하지만, 검찰 송치 후 재판까지 긴 시간을 구치소에서 보내며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구치소는 활발한 정보 공유의 장이다. 같은 방 범죄자들에게 무용담을 떠벌리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의 자백 말고는 범죄의 증거가 충분치 않음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스스로 재판 전략을 짜고 진술을 뒤집는다.
이런 경우가 적지 않다. 그렇다 보니 노련한 형사들은 자백을 혐의 입증의 시작이라고 여긴다. 비열한 살인범이 재판정에서 자신의 말을 뒤집을 수 없도록 단단한 잠금장치들을 채워서 사건을 올려 보내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병주는 말을 바꿨다.
그는 검찰 조사 때까지 석촌동 전당포 사건 피해자 2명을 자신이 죽였다고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막상 재판에 가서는 자신이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두 살인마를 잡아온 강남서 형사들은 베테랑이었다.
그들은 이병주와 이진구의 자백을 상세하게 검증하며 주변을 탐문했다. 그 과정에서 이진구의 장도리 손잡이를 잘라준 철물점 주인의 진술을 확보했다. 또한 범행 후 피 묻은 옷을 갈아입은 송파구의 한 호텔 주인으로부터 이진구와 이병주가 사건 당일 숙박했다는 증언도 확보할 수 있었다. 둘이 전당포에 있을 때 들렀던 여자 손님도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해 주었다.
자백과 간접증거 여러 개가 모이면 직접증거에 육박하는 증거력을 갖게 된다. 경찰이 마련한 증거의 그물은 촘촘했고, 재판부는 이병주의 변명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병주와 이진구는 최종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2006년 마무리된 이 재판에서는 석촌동 살인사건만이 다뤄졌다. 물론 둘은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그 섬뜩한 비밀은 두 사람의 심연 속에 깊이 잠겨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피고석에 앉아 자신들의 눈앞에서 숨져간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고작 사건 하나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판사와 검사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살인범 옆의
마약범
2007년 여름, 서울구치소에서의 일이다.
40대 마약범 최씨는 넉살이 좋고 누구와든 금방 친해졌다. 한편으로는 잇속 계산이 빠르고 자기한테 도움이 된다면 다른 사람도 기꺼이 이용하는 부류의 인물이었다.
최씨와 같은 방에는 무기징역을 받은 살인범이 하나 같이 지내고 있었다. 명찰 색깔은 달랐지만 최씨는 그와 금방 친해졌다. 최씨가 그에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무용담처럼 말하는 걸 들어보면 그 무기수는 사람을 한둘 죽인 게 아니었다. 재판은 한 번만 받았지만 뭔가 더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아직 확정판결이 나지 않은 미결수 최씨가 무기수를 눈여겨본 이유는 하나였다. 마약범의 경우 범죄를 제보하거나 수사에 협조하면 양형에 유리하게 반영해주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마약범들을 이용해 범죄를 찾아내고자 국가가 불가피하게 마련한 보상책이었다.
최씨는 무기수한테 뭔가 정보를 얻어내면 이를 제보해 자신의 다음 재판과 확정판결 전에 이롭게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최씨와 같은 방에 있던 무기수는 바로 이병주가 형님으로 모시던 공범 이진구였다.
잠자리도 공유하고 식기도 나눠 쓰며 개인 짐이랄 게 거의 없는 수용 거실의 특성상 뭘 뒤져서 이진구의 비밀을 캘 것은 없었다.
다만 최씨의 눈길을 끄는 것은 편지였다. 가족도 발길을 끊고 영치금도 한 푼 없는 처량한 무기수지만, 이병주라는 이름으로 종종 편지가 오고 있었다.
그 내용이 못 견디게 궁금했던 최씨는 어느 날 기회를 얻었다. 복도를 순찰하는 교도관들한테 안 보이게 창 밑에 붙어서 이진구가 잠들어있었다. 그 틈을 타 최씨는 자연스레 ‘이병주’라는 인물이 보낸 편지를 슬쩍 읽어보았다.
그 편지에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진구형님께 (중략)... 송파 일 말인데... 저는 자수하고 싶지도 않고 때가 되면 다 밝혀지지 않겠습니까... 가스검침으로 들어가니 아줌마가 열어주고 가버리고... 2명 중 1명 3~4번 칼로.. 1명 손에 칼 온몸 칼.. 이불로 덮고.. 오래돼서 기억도 없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최씨가 찾던 바로 그 내용이었다. 심지어 다른 편지에는 "우리가 죽인 사람 알려지면 강호순, 유영철은 게임도 안 된다"는 말까지 적혀있었다. 마약범 최씨는 곧장 '작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④ 수수께끼 놀이>에서 계속됩니다.
Q 파일 : 우리 사회의 문제를 들여다본 기록을 전합니다. 이번 편은 <그것이 알고싶다> 1306회를 돌아보며 못다한 이야기를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