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알고싶다’ PD로 3년을 일하며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알은 시청자들이 사랑하고 아껴주는 프로그램이고 사회적 영향력도 있지만 주로 극단적인 피해 사례가 발생한 사건을 다룹니다.
그알이라는 플랫폼에서는 다루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천천히 생각하며 되짚어봐야 하는 사회문제들을 소재로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한두 달이라는 짧은 제작기간도 아쉬웠습니다.
그러던 중 SBS의 유일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SBS스페셜>에 합류 제안을 받았습니다. 원래 그알을 몇 년 더 할 생각이었지만, 좀 더 호흡이 긴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은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올봄 정든 그알을 떠나 <SBS스페셜> 팀으로 옮기게 됐습니다.
<바디멘터리 : '살'에 관한 고백> 오프닝 시퀀스
그렇게 한해를 준비한 SBS스페셜 <바디멘터리 : ‘살’에 관한 고백>이 12월 29일 밤에 방송됐습니다.
원래 12월 8일 방송이었는데 직전에 계엄령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한 번 연기했고, 다시 정한 방송일이었던 12월 29일에도 너무나 안타까운 참사가 일어나 결방을 고려했습니다만..
예능 프로그램이 전부 결방하는 와중에도 저희는 방송을 결정했습니다. 이 다큐는 재난 속에서도 이어지는 우리의 ‘삶’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래 공들여 방송을 만든 제작진 입장에서는 조금 아쉬운 상황이었습니다.
화사를 비롯한 출연진들은 가면을 쓰고 시작한다.
애써 외면한 이야기
이 다큐에는 다섯 명의 친숙한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김완선, 한승연, 전효성, 소유, 화사 - 다섯 명의 여성 아티스트들입니다.
이분들은 성공한 여성 가수이면서도, 한국 대중문화에서 외모 관련 기사와 악플의 표적이 된 경험이 가장 많은 여성들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제가 이분들을 어렵게 한 자리에 모신 이유입니다.
방송에는 다섯 분의 이야기가 한 시간 분량으로 압축됐지만, 제작진은 사전 취재를 포함해 스무 시간이 넘는 동안 함께 깊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여성 연예인이 체중과 다이어트, 거식과 폭식 경험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꺼내기는 아직 한국 사회에서 쉽지 않습니다. 이는 화려한 K-엔터 산업의 ‘어두운 이면’이며 우리가 엔터테인먼트를 마음 편히 즐기려면 눈감아야 하는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전효성
이분들은 업계에서 성공한 인물들로서, 대중이 요구하는 전형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을 체현하고 그 이상적인 미모와 퍼포먼스로 사랑받아 온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이제 와서 “세상이 요구하는 미의 기준이 비현실적이고 그로 인해 고통받았다”는 고백을 한다면 누군가는 “그걸로 돈 벌어놓고 왜 뒤늦게 딴소리냐”는 비난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섯 분의 출연진과 이런 우려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용기 있는 고백’을 위해 촬영 당일 녹화 스튜디오에 나서 주셨습니다.
그것은 제작진과 다섯 여성들이 뜻을 모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몸과 아름다움에 대한 비현실적인 요구가 여성 연예인 당사자들의 몸과 정신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성인은 물론 초등학생 여아까지 외모 강박에 시달리게 만드는 현실... 이것을 한 번은 정확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유
현장의 분위기
이 작품을 만들며 모든 인터뷰를 진행한 사람으로서, 우리 주인공 다섯 분에 대한 기억을 나누고 싶습니다.
소유씨는 공황장애 당시의 상황과 그에 이르는 여러 고통스러운 경험을 구체적으로 털어놓았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우리 다큐멘터리의 핵심이 됐습니다. 초면의 방송국 제작진에게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까지 진솔하게 말해주었고, 저와 이소희 작가는 너무나 소중한 내용이라 구성과 편집에 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습니다.
효성씨는 방송 전부터 제작진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다큐멘터리의 방향과 내용을 함께 고민해 주셨습니다. 여성의 안전에 대한 사회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공격을 받는 부담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런 눈치보다는 무엇이 옳은가를 먼저 생각하는 모습이 멋지게 느껴졌습니다.
승연씨도 이 다큐멘터리의 취지에 깊이 공감하고 나서 주신 분입니다. 승연씨와의 대화에서는 여성 연예인의 다이어트 발언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을 누구보다 깊이 고민한 흔적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촬영 중간에 장비 세팅으로 공백이 길어질 때마다 힘들어하는 내색 없이 스텝들을 배려하며 현장의 분위기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한승연
화사씨의 촬영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됐습니다. 스탠바이를 위해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였을 텐데도 화사씨는 피곤한 기색 없이 긴 인터뷰에 임해주었습니다. 어려운 질문에도 폭소가 터질 만큼 재치 있는 답변을 들려주었고, 획일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평가를 자신의 예술로 돌파해온 사람다운 카리스마와 깊이가 느껴졌습니다.
완선 선배님은 이번 다큐를 기획하면서 꼭 모시고 싶었던 분입니다. tvN <댄스가수 유랑단>에서 보여주신 모습처럼, 데뷔 40여 년이 지나서도 직업적 역량과 에너지를 이렇게 높은 수준으로 지키고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이번 현장에서도 (방송에 등장하는) 안무 장면을 찍을 때 현장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보여주셨고, 단순한 연예인을 넘어선 진정한 아티스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분들에 대한 미담을 더 적고 싶지만, 분량 관계상 이 정도로 마무리합니다 :)
김완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일
다큐멘터리는 예술과 저널리즘의 가운데쯤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문제가 있고 누군가는 그 문제들로 인해 고통받습니다. 특정한 집단이 지속적으로 불이익을 받거나 심리적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그것을 차별이라고 부릅니다. 차별은 저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대부분의 차별은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 최근 윤석열이 벌인 일처럼 권력자의 언행은 언론의 주요 감시 대상이자 욕망의 대상이라 모두가 주목하고 중계합니다. 하지만 차별은 주로 약자들이 겪는 고통이라 특별히 주목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저도 여성들이 겪는 문제에 대해서는 온라인 성범죄나 스토킹처럼 피해가 명확한 사례에만 주목해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알 때부터 함께 고생한 두 20대 여성 제작진(조연출, 취재작가)이 여성들의 폭식과 거식 이슈가 지금 자신들 주변에서 얼마나 심각한지 얘기해주는 것을 들으며, 이것이 비가시화된 중대한 사회적 문제이자 차별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lessia Cara - Scars To Your Beautiful 뮤직비디오. 제작기간 가장 많이 들은 노동요였다.
여성들에게 강요되는 완벽한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한 분노와 스트레스를 다룬 노래나 뮤직비디오, 영화 등이 외국에는 많습니다. 저에게 영감을 준 작품으로는 1, 2, 3, 4, 5가 있고요. 왜 한국에는 이런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것이 없을까하는 아쉬움으로 이번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아름다움의 기준'을 다루는 좋은 책과 영화를 보며 앞서 몇 편의 글을 썼습니다. 읽어보시면 제가 이번 다큐를 기획하기까지 고민한 바를 좀 더 자세히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영화 <서브스턴스>, 책 <헝거>)
앞선 글에도 적었지만, 저는 우리 주인공들을 비롯해 여성들이 수동적인 피해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조금씩 종류가 다른 경쟁의 쳇바퀴를 돌리고, 여기에는 각자의 욕망이 에너지원이 됩니다.
그 쳇바퀴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큰 완벽함이 아니라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다큐멘터리가 기준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드렸으면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양질 전환을 거쳐 사회 문제가 조금씩 해소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다큐멘터리가 더 많은 분께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2025년 1월 중순경부터는 웨이브뿐 아니라 넷플릭스에서도 SBS스페셜<바디멘터리>를 보실 수 있습니다. ☀
※ SBS스페셜 바디멘터리 TV 재방송 : 1/2(목) 저녁 9:00, 1/4(토) 낮 12:20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