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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원 Jan 05. 2025

정의감 중독

<시빌워 : 분열의 시대>를 보고 나서 쓰다.


개성 강한 독립영화를 만들어온 제작사 A24와 다양한 사회적 폭력을 탐구해 온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영화 <시빌 워 : 분열의 시대>가 2024년 마지막 날 개봉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드는 여러 생각을 적으려다 보니 스포일러가 들어갔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 서서히 나타나는 이미지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아주 강렬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상황이 영화가 보여주는 참상과 꽤 가까워 보여서 더 숨막히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시빌 워>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내전이 벌어진 근미래의 미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극우파 대통령이 당선되어 사회 분열을 조장한 끝에 결국 내전이 일어난 상황입니다. 영화는 구체적인 배경 설명은 생략하고 내전 그 자체의 참상을 조명합니다.


이야기는 기자들의 긴 여정을 따라갑니다. 기자들이 워싱턴 D.C.의 대통령에게 내전의 책임을 묻는 인터뷰를 목숨 걸고 하러가는 여정에서 겪는 일들을 로드 무비 형식으로 보여줍니다.


우리가 밥을 먹고 산책을 하는 평범한 거리와 도로가 불탄 차량과 화염으로 뒤덮인 풍경은 그 자체로 충격입니다. 감독은 이전 작품들에서처럼 선명한 시각적 인상으로 관객을 자극합니다.


특히 저는 군복을 입은 금발 백인 남자와 일당이 마을 사람들을 몰살하고 주인공 일행을 위협하는 장면이 고통스러웠습니다. 타인을 나와 ‘같다’ or ‘다르다’ 이분법으로 분류한 뒤, 나와 다른 사람은 죽여도 된다고 여기는 광기를 차마 지켜보기가 힘들었습니다. 남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빌 워>의 한 장면


제자리인가?


우리는 이미 세계대전과 6.25 전쟁에서 집단학살의 광기를 목격했습니다. 그 끔찍한 역사에서 교훈을 얻은 인류가 성숙한 사회를 이룩했다고 믿었는데, 알고 보니 성숙한 게 아니라 그저 원 모양으로 순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느껴지는 공포랄까요.


나와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나와 다른 사람이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이 싫다.

나와 다른 사람한테 화가 난다.

나와 다른 사람은 잡아 죽여도 된다.


우리 민주주의 사회가 유지되려면 이 다섯 문장 중 적어도 위쪽 두세 개에 사람들의 생각이 머물러야 합니다. 그런 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마지막 문장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성공한 법률가이자 대통령까지 된 인물이 선거 조작을 주장하는 극우 유튜버와 손잡고 내란을 선동하는 세상입니다. 경제난과 불평등으로 매일의 삶에서 굴욕을 느끼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소외시킨 세상에 대한 적의를 ‘좌파의 선거 조작’ 같은 음모론을 통해 폭발시킵니다.


한국이 총기소지가 불법이라 아직 칼이나 둔기를 휘두르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정치인을 향한 극단적 테러도 최근 몇 년 사이 꾸준히 늘었습니다. 다음 대선이나 총선에서 내란의 잔당들이 패배한다면 선거가 조작되었다고 믿는 이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2021년 6월 트럼프 지지자들이 선거 패배에 불복해 무장 폭동을 일으킨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사건이 남의 일만은 아닐 수 있다는 우려가 듭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지만 더 깊은 질문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던져집니다.


크레딧이 올라갈 때 서서히 나타나는 사진은 죽은 파시스트 대통령의 시신을 가운데 두고 웃는 ‘정의로운’ 서부군 군인들의 모습입니다. 그 사진을 찍은 이는 내전의 참상을 알리겠다는 ‘정의로운’ 동기로 목숨을 걸고 기자 일행을 따라 워싱턴으로 온 기자 지망생이고요. 그는 자기 대신 총을 맞은 선배 기자를 버려놓고 이 방으로 뛰어들어온 상황입니다. 대통령 사살 장면이라는 특종을 건지려고 말이죠.


이 영화에는 끝까지 정의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전쟁 영화 특유의 감동이나 선이 이기고 악이 패하는 멋진 결말도 없습니다. 오히려 감독은 치열한 교전 끝에 나쁜 쪽이 죽어서 관객의 심장이 웅장해질라 하면 요란한 디스코나 펑크 음악을 깔아서 감정 이입을 방해합니다.


목숨 걸고 대통령 인터뷰를 가는 기자 일행의 중년 남자는 자기보다 스무 살은 어려 보이는 지망생을 꼬시다가 차에 태워주었고, 불타는 백악관 앞에서 동료 기자와 나누는 대화는 고작 ‘누가 더 특종을 땄느냐’입니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대통령을 만나서 던지는 마지막 질문마저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시빌 워>의 한 장면


이런 이야기 속에는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감독의 깊은 고민에 대한 나름의 답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양편으로 갈라져 싸우는 군인들, ‘순수 미국인’이 아니면 죽여도 된다고 믿는 백인 남성들, 특종을 위해 동료를 버리는 기자들.. 이들 모두 그 순간에는 자신이 정의롭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가 믿는 정의를 실현하려고 동료를 버리거나 상대를 죽입니다.


하지만 자기 신념만이 옳다는 일종의 정의감 중독 혹은 그저 우리 편이 더 확장하는 것이 정의라고 믿는 정체성 정치가 우리의 갈 곳을 잃게 만든 것 아닌가.. 이렇게 모두가 상대가 틀렸다며 자기실현에 나선다면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런 질문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사람살이의 일


예전에 한번 글로도 썼습니다만, 황석영의 <손님>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간단히 배경을 설명하자면, 해방 후 혼란 속에서 예수교(당시 말로 ‘야소교’)를 믿는 이들과 사회주의를 믿는 이들이 각자 자신을 정의라고 믿으며 상대를 학살하는 어지러운 상황을 돌아보며 주인공이 내뱉는 독백입니다.


“그때 우리는 양쪽이 모두 어렸다고 생각한다. 더 자라서 사람 사는 일은 좀 더 복잡하고 서로 이해할 일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되어야만 했다. 지상의 일은 역시 물질에 근거하여 땀 흘려 근로하고 그것을 베풀고 남과 나누어 누리는 일이며, 그것이 정의로워야 하늘에 떳떳한 신앙을 돌릴 수 있는 법이다. 야소교나 사회주의를 신학문이라고 받아 배운 지 한 세대도 못 되어 서로가 열심당만 되어 있었지 예전부터 살아오던 사람살이의 일은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176p)


결국 모두가 자신이 옹호하는 정체성을 위해 ‘열심당’이 되기 전에 ‘사람살이의 일’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호흡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한 관용과 공존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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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의 방에서 나온 '딥 스테이트'
☞ 저는 여러분의 '복수'입니다
보나쓰 : 주말쯤 좋은 것들을 보고 나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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