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낮은바다 Oct 18. 2020

스카팽 | 300년을 넘어온 카타르시스


2년마다 시즌 단원을 뽑는 국립극단의 올해 경쟁률은 40대 1이 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다 경력이 상당한 배우들만 지원했는데도 그랬단다. 수많은 연극인들 중에서도 잘한다는 사람들을 모아놓은 팀이 있다면? 감사한 일이고 꾸준히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내게 국립극단은 매력적이다.


<스카팽>이 상연 중인 국립 명동예술극장


애정하는 국립극단 연극을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한편도 놓치지 않고 볼 생각으로 비싼 유료 회원까지 가입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몇 달간 아예 공연이 열리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이었는데 코로나 확진자가 줄면서 어찌 됐든 다시 공연이 시작됐다. 여름을 건너뛴 국립극단의 하반기 첫 레퍼토리가 <스카팽>이다.  




드라마든 연극이든 형식이 다른 여러 '극'을 보는 이유는 나로서는 확실히 카타르시스 때문인 것 같다. 권선징악이든 우주탐험이든 어떤 해소감과 새로운 체험에 대한 욕구 때문에 여러 극을 소비한다. 버티는 일상에서 시나브로 쌓이는 독한 기운들을 그렇게 배출하며 어떻게든 살아보자는 것이다.


결국 <스카팽>의 줄거리는  많은 하인이 돈 많고 힘 있는 윗분들을 엿 먹이는 내용이다. 양반을 조롱하며 민중들에게 정신적 해방감을 줬던 말뚝이(봉산탈춤의 주인공)와 거의 비슷한 인물이 주인공이다. <스카팽>의 원작이 3백 년 전에 나왔다는데,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삶은 비슷한 걸까? 같은 카타르시스가 수백 년의 시간과 공간을 건너 통한다는 사실은 신기하다. 허나 한편으론 이렇게 세상이 나아진 바가 없나 싶어 씁쓸한 느낌도 든다.


어쨌거나 이 모양인 세상에서 <스카팽>이나 <봉산탈춤> 같은 스토리가 수백만 편쯤 나왔을 텐데, 살아남은 극에는 뭔가 특별한 요소가 있지 않을까? 2020년 한국에서 나같이 무지한 사람에게 알려질 정도의 디테일이 있을 것이고, 그 사소하지만 특별한 차이를 만드는 것이 연출가와 배우들의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스카팽(좌), 그리고 재밌게도 작가인 몰리에르(우)가 극에 등장한다.



<스카팽>은 배우들의 연기가 정말 매력적이었다. 특히 생동감 있고 리듬 넘치는 움직임이 기억에 남는다. 프랑스에서 마임을 전문적으로 배워 극에 녹여온 연출가 임도완의 역량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때로는 호흡이 척척 맞는 군무 같고 때로는 절도 있는 마임 같고, 어떨 때는 웃음 터지게 만드는 슬랩스틱 같은 움직임들이 극을 꽉 채웠다. 이야기가 단순해도 극이 느슨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이런 디테일에 있었다.


(주워들은 것 좀 읊어보자면 - 이 연극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특징이라는데) 노래를 연극에 많이 녹여냈다는 점도 좋았다. 중간에 스카팽과 실베스트르, 옥따브가 나란히 앉아 랩을 하는 장면이 있다. 절로 내 몸이 박자를 따라 들썩거릴 정도로 신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연출가 임도완은 연극 안에서 랩을 하는 게 익숙지 않아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젊은 배우들의 의견을 반영해 넣었고 결국 공연 때마다 관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가 되었다고. 나이가 먹어가면서도 자기가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열어놓고 같이 작품을 만드는 노 연출가의 모습이 멋지다.

 

이밖에도 극 안에는 요즘 유행하는 밈이나 최근의 사건들을 떠올리게 하는 따끈따끈한 애드립들이 많았다. 메인 테마곡 가사(장가 가면 아들이 가지 아빠가 가나 / 시집 가면 딸이 가지 엄마가 가나)까지 이 시대 젊은 관객들의 마음에 섬세한 물결을 일으킬 만한 디테일이 많았다.


국립극단에서는 관객들의 요구를 반영해서 계속 공연 내용을 업데이트 한다. 관객들이 노래 가사를 궁금해하니 만장에 가사를 적어서 들고 나오는 섬세한 연출에 박수를!


무대 비주얼은 근래 본 뮤지컬과 연극 중 최고였다. 단순한 무채색 무대 위에 원색의 점처럼 화려한 의상과 분장으로 번져가는 배우들의 움직임은 과감하고 진보적인 현대미술가의 붓놀림 같았다. 강렬한 미적 자극이었다.


무대를 너무 신성시하지 않는 연출도 좋았다. <스카팽>은 무대 위에 무대를 놓고 그 위에서 공연이 이뤄진다.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들도 무대 주변에 앉아 리액션을 하거나 효과음을 넣고, 역할을 마치고 내려온 배우들에게 격려를 하기도 한다. 무대 연출이 굉장히 유연한 느낌이랄까? 그렇게 무대와 관객의 거리가 가깝다 보니 갑자기 배우가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 어색하지 않았다. 코로나로 지친 마음을 서로 위로하는 이야기를 나누며 배우와 관객이 한 자리에서 같이 공연을 만들어가는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국립극단은 매년 정해진 레퍼토리에 따라 공연을 한다. 그런데 코로나로 몇 편의 상연이 취소됐다. 보고 싶었던 공연을 놓친 나의 마음은 아쉬움 정도였지만, 아예 관객을 만날 수조차 없었던 배우와 연출자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배우들이 건네는 말 속에서 그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프로그램 북에 보니 마스크를 끼고 연습을 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이 시대를 견디는 수많은 생활인들의 단면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관객들이나 배우들 모두 잘 버텨왔다. 특별히 그들은 이 연극을 위해 노력해서 우리에게 쉴 새 없는 재미와 카타르시스를 선물해주었다. 강력한 위로이자 예술적 체험이었다.








2020 시즌 <스카팽>은 11월 15일까지 공연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김지은입니다 | 한국 진보남성의 무한한 발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