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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유정 Nov 14. 2021

정리하지 못한 방, 정돈되지 않는 삶

나의 스물일곱에게_04

#망해버린_패턴

최근 내 일과는 이랬다.

아침 7시 40분, 다섯 번째 알람에 간신히 눈을 떠 부랴부랴 나갈 준비를 한다. 제일 먼저 보이는 옷을 주워 입고 미처 다 말리지 못해 축축한 머리를 휘날리며 뛰어나간다. 아슬아슬하게 지하철 탑승. 위드 코로나 이후로 지하철에 사람이 많아져서 휴대폰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끼여서 출근한다. '아, 진짜 비인간적이다', '그래도 일할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해'와 같은 의미 없는 생각을 반복하다가 회사에 도착한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 피곤을 떨치고 싶은 마음과 카페인을 줄여야겠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다 디카페인 커피로 합의한다. 여러 프로젝트를 병렬로 진행하느라 정신없이 9시간이 흐른다. 퇴근할 때쯤 다짐한다. 진짜 오늘은 집에 가서 집안일도 끝내고, 글도 써야지! 다짐이 무색하게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전된 채 뻗어버린다. 잠깐만 누워있다가 일어나려고 했는데 잠들어버려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게 문제. 화장도 지우지 못하고 불도 켠 채로 잠들었다가 불편해서 새벽에 깨면 그렇게 허무하고 화가 난다. 밀린 설거지도, 빨래 정리도, 정말 아무것도 못했는데... 하, 오늘도 망했다.

원망할 곳도 없다. '내일 퇴근하고 와서 꼭 해야지' 다짐하지만 피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누적돼버리기만 해서 또 어제와 비슷한 하루가 반복될 뿐이다.


#지저분한_방의_나비_효과

그렇게 목요일쯤 자취방의 상태를 보면, 개판이 따로 없다. 잔뜩 쌓인 설거지와 빨래.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가지들. 방이라고 칭하기도 민망하다. 주변이 깨끗해야 뭐라도 하고 싶은 법인데, 난잡한 환경에 있으니 그냥 다 외면해버리고 싶다. 밥도 먹기 싫고 글도 쓰기 싫다. 그래서 그냥 이불속에 파묻혀 15초짜리 웃긴 영상이나 휙휙 넘기면서 보다가 저녁을 통째로 날려버린다. 차라리 그 시간에 얼른 씻고 방 정리를 하면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두세 시간씩 손가락 까딱이며 낄낄댈 힘은 있으면서 몸을 일으킬 힘은 안 난다. 정리하지 못한 방에서 사는 게 이렇게나 위험하다.

그런 식으로 일주일 보내고 주말이 오면, 그렇게 공허할 수가 없다. 지난 일주일 동안 도대체 어떤 삶을 산 것인가.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데. 퇴근 이후의 시간도 회사에서처럼 알차게 보내고 싶은데. 삶이 망가지도록 나 스스로 방치하고 있는 건 확실한데, 도저히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막막했다. 괜히 체력 탓을 하며 비타민을 결제했다. 이대로 뒀다간 영영 정돈되지 못한 삶을 살 것 같다.

#강제로_부지런해지기_프로젝트

일단 주말에 밀린 대청소를 했다.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개고 분리수거도 했다. 이부자리와 책상을 정돈하고 환기를 시켰더니 방이 달라 보였다. 그래, 내 방이 원래 이렇게 생겼었지. 그리고 다이어리를 꺼내 크게 적었다. 앞으로 퇴근하고 집에 와서 절대 바로 눕지 말 것! 씻고 대충이라도 정리할 것!! 씻기만 해도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풀려서 뭐라도 할 힘이 생긴다. 그 힘으로 방을 청소하고 나면, 깨끗해진 방 안에서 뭐라도 하고 싶어 진다. 그러면 나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쓰다가 잠들 수 있다.


그리고 부지런해지기 위한 한 가지 습관 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존경하는 선배가 매일 일기를 쓰는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선배가 추천해주신 일기는 5년 일기장인데, 나는 3년짜리로 구매했다. 한 페이지에 2021년 11월 13일, 2022년 11월 13일, 2023년 11월 13일 일기가 담기는 형태인데, 대여섯 줄 정도 짧게 쓰도록 구성되어 부담도 없다. 1년 전 오늘은 뭐하면서 보냈나 보는 재미도 있을 거 같고, 1년 후의 내가 오늘을 돌아볼 때 어떤 마음일까 궁금하다. 솔직히 이틀씩 밀리기도 하고 대충 쓰는 날도 있지만 아주 큰 도움이 된다. 퇴근하자마자 뻗고 싶더라도 일기를 쓰기 위해 몸을 일으켜 주변을 정리하고, 일기를 쓰면서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 때문에 강제로 하루를 잘 마무리하는 것은 덤. 삶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렇게 잘 살아낸 하루들이 보여서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면, 내가 최근 주말마다 느꼈던 공허함이 사라지겠지.


요즘 들어 새삼 잘 사는 게 어렵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바로 씻는 게, 설거지를 바로바로 하는 게, 불 끄고 자는 게 그렇게 어렵다. 이번처럼 삶을 정돈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을 하나씩 터득하다 보면, 언젠가 맘에 쏙 드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나는 잘 사는 어른이 되고 싶다.




글 양유정

그림 지안 (instagram@inside_gsu)



<나의 스물일곱에게> 시리즈 다시 읽기

프롤로그 : 얼렁뚱땅 서른이 될 순 없으니까
01 : 인생에도 내비게이션이 있다면

02 : 변하는 내 모습이 맘에 들어

03 : 내 결혼 생활은 이런 모습이기를

04 : 정리하지 못한 방, 정돈되지 않는 삶
05 : 누가 뭐래도 진심을 다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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