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물일곱에게_05
처음 정규직으로 입사했던 이전 직장은, 원하는 직무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회사지만 동시에 퇴사할 때까지 날 우울하게 만든 곳이기도 했다. 만족스럽지 않은 연봉, 경직된 조직 문화, 자꾸만 바뀌는 회사의 방향성... 우울함의 원천은 많았지만 어느 하나 명쾌히 꼬집지는 못했다. 그런데 최근 방송 작가로 일하는 친구 H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무릎을 탁 쳤다. H도 한동안 다 그만둘까 싶을 정도로 우울했다는데, 그녀의 상황이 그때의 나와 굉장히 비슷했다. 그래서 우리를 오래도록 우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원인이 뭐였냐면... 바로 '함께 일하는 직장 선배들의 태도'였다.
직장 선배들이 우리를 못살게 굴었냐고? 막 갈궜냐고?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를 위해주었다. 다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이런 식의 말을 자주 했다.
"어차피 사람들도 많이 안 보는데 적당히 해~"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H와 나는 '사람들이 많이 봐야 하는'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했다. 나는 미디어 플랫폼에서 기사를 썼고 H는 시사교양 장르의 TV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몸담았던 미디어는 인지도가 없었고, 친구가 만드는 방송 또한 장르가 장르인지라 대중적이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열과 성을 다해 만들고 있는데, 어차피 사람들도 많이 안 보니까 적당히 하라니. 어쩌면 그들은 우리가 너무 스트레스받으며 일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조언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우리의 기운은 쭉 빠졌다. 출근해서부터 퇴근할 때까지. 아니, 어쩌면 출근하기 전부터 퇴근한 이후까지, 더 많은 사람들이 봐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토씨 하나까지 고민하는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말이었다. 내가 하는 일이 별 대단한 일도 아니구나 싶게 만드는 그런 말 말이다.
솔직히 편하게 일할 수도 있었다. 적당히 일하는 게 당연한 분위기였으니까. 실제로 나는 다른 선배들의 기사에서 수많은 맞춤법 오류를 찾았다. 간간히는 잘못된 정보를 발견했다. 틀린 맞춤법은 콘텐츠의 신뢰도를 확 낮출 것이고, 틀린 정보는 미디어의 전문성을 떨어뜨릴 것임이 분명했다. 그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하는지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내 일에 진심이었으므로, 그리고 언젠가 사람들이 내 콘텐츠를, 우리의 플랫폼을 봐줄 거란 믿음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모두가 열심히 해서 시너지를 내도 모자랄 판에, 각자 적당히 일하기 바빴으니 성과가 지지부진할 수밖에. 결국 우리 플랫폼은 출범한 지 2년 만에 사업성 검증에 실패하고 문을 닫아야 했다. 마음을 쏟았던 사업을 중단해야 하는 것도 나를 슬프게 했지만, 그 무렵 나를 무너지게 만든 일은 따로 있었다. 회사를 떠나는 어떤 선배가 내게 마지막 조언으로 '서비스와 너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던 바로 그 순간이다. 서비스의 흥망성쇠에 나의 희로애락을 좌우하지는 말라는 뜻일 터. 그 선배는 나를 위하는 마음을 담아 조언하셨겠지만 난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그동안 혼자 아등바등 애썼던 모든 시간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내가 맞는 줄 알았는데. 내 이름을 달고 발행되는 기사는 곧 나를 대변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만 이렇게 미련하게 일하는 건가 싶어서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이전 회사에서의 시간이 내 방식을 좀 바꾸었냐고 묻는다면? 전혀. 나는 나를 바꾸는 대신, 계획보다 조금 더 빨리 이직했다. 아예 새로운 플랫폼을 만드는 회사로. 새로 만드는 플랫폼인 만큼 어떻게 콘텐츠를 서비스할 것인지부터 전략과 운영방식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에 내 가치관을 녹일 수 있다. 무엇보다 (거의) 모든 직원이 서비스 론칭을 목표로 한마음 한 뜻으로 일한다는 게 가장 좋다. 이미 타성에 젖어버린 동료들이 아닌, 열정 넘치는 동료들 사이에서 '평범하게 열심히' 일하면 되니까.
누군가는 아직 내가 사회초년생이라서, 주니어라서, 그리고 어려서 열정이 앞서는 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리 나이에, 우리 연차에 적당히 한다고 큰일 나는 일을 맡긴 어려운 게 사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스물일곱의 나는 그렇다. 내가 기사에 맞춤법 하나만 틀려도 큰일이 났음 좋겠다. 막 실망이라고 대중들이 비난해줬으면 좋겠다. 그 정도로 대중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나중에 라면 모를까, 적어도 지금은 좀 빡세더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성장하고 싶다. H도 더 대중적인 프로그램(이를 테면 예능)으로 가려고 준비 중이라고. 진심을 다하는 스물일곱의 우리가 자랑스럽다. 우울했지만 진심을 담았던 시간들이 분명 좋은 거름이 되어 멋진 꽃을 피울 것이다.
글 양유정
그림 지안 (instagram@inside_gsu)
<나의 스물일곱에게> 시리즈 다시 읽기
프롤로그 : 얼렁뚱땅 서른이 될 순 없으니까
01 : 인생에도 내비게이션이 있다면
02 : 변하는 내 모습이 맘에 들어
03 : 내 결혼 생활은 이런 모습이기를
04 : 정리하지 못한 방, 정돈되지 않는 삶
05 : 누가 뭐래도 진심을 다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