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 중 누구에게 기분이 나빠야 할까?
어제 만난 70대 택시기사는 “강남역에 세워달라고?”라며 반말을 했다. 그저께 동호회에서 만난 5살 많은 언니는 내 나이를 듣고선 “어머 어려 보인다. 말 편하게 할게. 괜찮지?”라며 말을 놓았다. 나와 같이 일하는 10살 많은 팀장은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쓴다. “저번 주에 우식님이 봤다고 한 거 있잖아. 에밀리인파리? 나도 어제 봤는데 배경이 너무 예쁜 거야~ 소이님도 봤어요?”
연장자가 말을 놓기로 마음먹었다면 어린 상대에게는 딱히 거부권이 없다. 처음 보고 말 사이라면 “왜 반말하세요?”라고 할 수 있지만 앞으로 계속 마주해야 할 사람이라면 반말에 수긍하는 것이 마땅한 눈치로 통한다. 애초에 위계 문화가 철저한 집단이었다면 떨떠름한 티를 내비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관계들의 반말은 연장자가 권력자라는 불평등이 내재화된 것 같아 세 명 모두에게 기분이 나빴다.
반말의 장점도 많다. SNS상에서 초면부터 반말을 사용해 예의나 격식 없이 빠르게 친해지는 반말 모드를 쓰는 모임도 10-20대 사이에서 만연하다. 반말은 친근함의 척도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쓰는 반말은 문제가 되지만, 친한 관계에서의 반말은 오히려 정과 친근감의 표현이라 바람직하다. 어떤 스타트업에서는 존댓말의 비효율성을 없애고 수직 관계를 깨기 위해 전 직원이 반말을 사용하기도 한단다.
반말을 부적절하게 써서 사달이 날 수는 있어도 존댓말을 써서 잘못되는 일은 거의 없다. ‘말할까 말까 할 땐 하지 마라’라는 말처럼 반말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상책 같다. 특히 교복을 입은 학생에게도 예외는 없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교복 입은 학생에게 “고속터미널을 가려면 교대역에서 갈아타야 합니까?” 라고 하시는 것을 보고 참 새롭고 기품있는 어른 같다고 느낀 기억이 있다. 장유유서가 미덕인 시절을 겪으신 분이지만 본인은 악습을 대물림 하지 않은 것이다.
관계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게 말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예민하다는 말도 종종 듣는다. 얼마 전 친구랑 쇼핑하고 옷을 수선하러 세탁소에 갔는데 나이 지긋하신 세탁소 사장님이 친구에게 반말을 했다. “밑단만 줄이면 되니까 30분만 이따가 와. 현금이면 좋고” 친구는 알았다며 ATM기를 찾아 나섰다. 정작 반말을 들은 친구는 아무렇지 않아 했는데 옆에서 보는 내가 기분이 나빠서 '저 아저씨는 왜 반말이야..' 하며 툴툴거린 적도 있었다.
물론 언어문화와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도 교복 입은 학생에게 존댓말로 길을 물어보던 할아버지처럼 나도 악습은 내 선에서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싫었던 경험을 내가 겪었던 문화라고 해서 대물림해줄 순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