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의 운명을 만드는 세상

메이저 10번 카드. 운명의 수레바퀴

by 시애

나는 시험을 좋아했었다. 마음도 몸도 약한 나의 존재감이 가장 커지는 때가 시험 기간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내 자리로 왔다. 필기한 공책과 프린트물을 빌리거나 공부하다 모르는 걸 묻거나 방금 친 시험 답이 맞는지 확인하러. 쭈뼛대며 말할 주제를 찾지 않아도, 방금 내가 한 말이 웃겼는지 반응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깨가 펴지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와 반대의 이유로 시험 때마다 등이 굽어지던 친구들도 많았겠지. 현재 대한민국의 주류 교육시스템은 몇 명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나머지 대다수의 힘을 빼는 방식으로 돌아간다. 내 에너지를 다 빼주고 나면 원기옥 쏘는 손오공은 영웅이 되지만, 기를 뺏긴 지구인들은 숫자에게 혼나고 부모님께 혼나고 자신의 마음에게 다시 혼난다.






‘운명의 수레바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메이저 10번 카드에는 공부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천사도, 독수리도, 사자도, 황소도 다 책을 펼쳐놓고 공부 중이다. 가야 할 길이 남았으므로, 아직 더 배워야 한다. 수레바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아갈지, 부정적인 방향으로 돌아갈지는 나에게 달렸다.



나에게 달려 있다, 라고 믿고 공부를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누구나 자기 삶이 성장형 캐릭터의 서사이기를 꿈꾼다. 성실하게 경험치를 쌓으면 레벨업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번 판만 잘 견디면 레어 아이템도 많이 나오겠지. 그러면서도 다들 알고 있다. 치트키와 매크로 프로그램만 있으면 굳이 시간을 안 들여도 편하게 레벨을 높일 수 있으며, 진짜 레어 아이템을 얻는 데는 ‘현질’만 한 게 없다. 2020년에 출간된 책 《세습 중산층 사회》에는 부모의 소득 수준과 자녀의 자기 학습 시간 간의 관계를 분석한 데이터가 나온다. 집값 비싼 동네 아이들의 성적이 좋다는 속설을 데이터로도 확인할 수 있다. 부모의 막강한 현금 버프를 받는 아이들은 명문대학이라는 레어 아이템을 더 쉽게 획득한다. 그 이후에 벌어질 격차에 대해서는 일일이 언급하기 민망할 정도다. 가난을 딛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 삶이란 힙합 가사에만 등장하는 무지개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교사다. 어린 친구들, 젊은 친구들이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느끼며 시간을 보내는가에 관심이 많다. 정작 내가 성적과 취업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 없다는 한계를 알기에 조금 더 의식적으로 듣고 읽고자 한다. 노력한다고 해도 결국 내가 이해하고 짐작할 수 있는 마음들은 피상적인 수준일 것도 알고 있지만.



내가 조금 이해한 바는 이러하다. 어느 순간 내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이 나의 노력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 당혹감이 덮쳐오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주어진 공부를 해내지 못하면 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으로 꾸역꾸역 자리에서 버텨야 하는 시간이 또 있을 것이다. 온전히 자신의 힘과 의지만이 변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끈기 없는 청춘을 탓하는 목소리들과 자기 비하와 자기 위로를 위태위태하게 오가는 청춘의 목소리들을 만나면 서글프고 안쓰럽다.



청소년과 청년만이 아니다. 내가 만나는 어린이들이 살아내는 하루들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다. 잘 먹고 행복하게 살려고 공부하는 건데, 어째서 초코파이나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새벽까지 영어 숙제를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자신이 더 잘하게 될 거라는 기대로 반짝이는 아이는 별로 없다.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평범하게 살기 위해 버틴다. 아이에게 공부하고 숙제하라고 하는 시간만큼 어른들에게 야근을 시킨다면 아이들처럼 묵묵히 다 해낼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어렸던 나는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는 꿈과 믿음이 있었나.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중학생 때 IMF에 휘청거리는 어른들의 사회를 보며 부푼 희망보다 생존이 우선이라는 현실을 깨달았다. 자라면서 ‘경기가 좋으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라’는 뉴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매 순간 위기라고 말하면서 그래도 낭만적이고 커다란 꿈을 꾸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크게 부풀려 놓았던 꿈이 터지면 그만큼 크게 아픈 건 아이들도 다 안단 말이야.



나는 시야도 좁고 정책전문가도 아니라서 우리 사회의 어디를 어떻게 고치면 좋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공부하는 이들이 시작도 하기 전에 해탈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미리 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지금 자기 운명의 수레바퀴를 스스로 돌릴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장래 희망 직업이 건물주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있는 세상은 어른들의 잘못이다. 미안해.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