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9번 카드. 은둔자
가덕도에 갔었다. 탁 트인 바다를 실컷 보고 새바지항으로 갔다. 잠깐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새바지항의 인공동굴이 가덕도의 관광지로 유명하단다. 바다 냄새 진하게 나는 항구를 지나 작은 인공동굴에 도착했다. 더러워진 표지판이 ‘1945년 대한 해협 상공에 미군기가 출몰하고…… (중략) 이에 일본은 부산과 주변 해안에 미국 상륙 작전을 대비하기 위한 방어시설을 구축하였다. 가덕도 대항 마을의 인공동굴도 이와 같은 정세에서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전국 광산기술자와 조선인들을 징발하여 구축하였다.’라고 열심히 동굴을 소개했다. 아, 난 이런 인공동굴들을 알고 있다. 어릴 적 들은 이야기들이 역사를 입고 되살아났다.
외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셨다. 정신대 끌려가기 전에 받는 무슨 훈련 중에 광복이 되었다고 한다. 노래 부르듯 며칠 걸러 한 번씩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중 하나가 인공동굴 레퍼토리였다. 등굣길이나 하굣길 머리 위에 비행기가 뜨면 마을 곳곳에 파놓은 땅굴에 들어가서 비행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셨다고 했다. 며칠이고 숨어 있어야 할 것을 대비해 책보자기에는 항상 미숫가루를 넣어 다녔다고. 비행기가 뜨고 누군가가 “게이가이게요!”하고 소리치면 다들 땅굴로 숨었다며 목청을 돋우어 그때의 소리를 재현하시곤 했다.
외할머니의 얘기가 조금 다르게 들리기 시작한 건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일제 강점기 시대 이야기인데, 외할머니의 어린 시절에는 굶주림이 없었다. 대신 사흘마다 가마솥에 폭폭 쪄낸 떡이 있었고 계절마다 마을 사람들과 잔치를 벌이면서 먹었던 오만 가지 음식이 있었다. 집에서 막걸리를 담글 때마다 사촌 동생과 둘이서 술 찌꺼기를 몰래 먹다가 하루는 맛있다고 너무 많이 먹어 잠들고 말았다던 에피소드를 굉장히 좋아하셨고, 당시 마을에 생겼던 일본인 공장의 양갱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얘기하는 것도 좋아하셨다. 백석의 시를 길게 풀어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외할머니는 그 시절에도 머슴을 부리던 부잣집의 막내딸이셨다. 등굣길에 책보자기를 안고 땅굴로 들어갈 수 있었던 여학생이었던 것이다.
나는 외할머니의 손녀이기도 했지만, 엄마의 딸이기도 했는데, 엄마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 아무리 졸라도 내가 듣고 싶다는 얘기는 끝내 해주지 않으셨다. 늘 당신이 아주 어리던 시절의 이야기만 하셨다.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마을에서는 잔치가 열리고 머슴을 두고 살던 한때. 엄마 어릴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몇 번째 조르다 실패하고 어느 날은 심술이 나서 말했다.
“할매, 그 시절에 잘 살았던 거는 자랑 아이다. 어디 가서 일제시대에 억수로 잘 살았다카믄 사람들이 뒤에서 욕할 수도 있다.”
그 후로 외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차차 횟수가 줄어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는 어쩌다 듣는 이야기가 되었다. 여전히 같은 단어로 같은 시절을 말씀하시긴 했지만.
당신의 목소리로 들을 수 없었던 이후의 이야기들은 다른 친척들의 입을 통해 조금씩 전해 들었다. 귀한 막내딸이셨던 외할머니는 내가 알고 있던 시절 이후에 곧 부모님을 잃는다. 올케는 머슴들이 나간 후에 온갖 집안일을 죄다 외할머니에게 시킨다. 조금 머리가 크니 한국전쟁 난리 속에 혼자 부산까지 피난 온 외할아버지에게 시집을 보내 버린다. 부부는 태산 같은 가난을 등에 지고 세 아이와 함께 한국의 근대사를 건너오셨다. 말로 옮기지 않으셨던 시간은 서러운 잠꼬대로만 남아 나는 간혹 꿈속에서 올케와 만난 외할머니를 깨웠다.
메이저 9번 ‘은둔자’ 카드에는 칙칙한 망토로 온몸을 감싸고 고개를 수그린 노인이 홀로 서 있다. 그는 혼자 고된 시간을 견디며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과 삶의 본질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성숙한 지혜를 얻으려면 그처럼 홀로 자신을 오래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글자로 쓰니까 멋있어 보이지만, 그거, 힘들잖아. 자기 안으로 침잠하여 혼자서 자신을 곱씹어야 하는 시간은 아프잖아. 마스터도 말씀하셨다. 이 카드가 보이는 사람은 일단 위로해 주세요.
가만히 카드를 들여다보면 은둔자가 그 와중에도 양손에 꼭 쥐고 있는 것들이 보인다. 외로운 그가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들, 잠시 몸을 지탱해 줄 지팡이와 마음을 기댈 등불이다. 누구에게든 등불이 되어주는 존재가 있겠지. 지난한 생을 건널 수 있게 해주는 기억들이 있겠지. 혹시 외할머니에겐 빛나던 유년의 기억이 그것이었을까. 당신에게도 편안히 사랑받던 시절이 있었다는 자부심으로 매서운 세월을 견디셨던 걸까. 나는 대체 무슨 말을 해버린 건가.
자꾸만 꿈에서 올케가 탄 버스를 마주치신다던 외할머니는 결국은 버스를 같이 타고 가셨다. 올케가 마음 고쳐먹고 좋은 데 모셔간 거면 좋을 텐데. 할매, 내가 할매 얘기 다 못 들어줘서 억수로 미안타. 우리 할매, 거기서는 엄마도 만나고 아빠도 만나고 양갱도 많이 묵고 아프지 말고 있으라. 내 난주 엄마캉 이모캉 할매 보러 가께. 그때 또 얘기 마이 해도가.